노스탤지어

유리병 속의 불빛처럼

by Helia

한밤중, 골목 모퉁이에서 오래된 분필 냄새를 맡았다. 그 순간, 스무 해 전 여름방학이 불쑥 돌아왔다. 교실 창문 틈새로 스며들던 바람, 칠판 위에서 부서지던 하얀 가루, 방과 후 운동장 위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그 시절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었다.

노스탤지어는 불쑥 찾아온다. 회상과는 다르다. 사진처럼 선명하게 복원하지 않고, 필요한 감각만 남긴다. 오래된 필름 위에 빛이 번지듯 선은 흐려지고 색은 바래지만, 그 속에만 있는 온기가 있다. 볼 수 없는데 손끝이 간질거리고, 만질 수 없는데 심장이 천천히 조여 온다.

내가 자란 동네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주택가였다. 골목마다 비슷비슷한 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낮이면 가게 앞에 쌓인 채소 상자들이 햇볕에 반짝였다. 여름밤엔 골목길 시멘트 바닥이 하루 종일 머금었던 열을 서서히 내뿜었고, 그 위를 고양이들이 지나갔다. 그때 나는 그런 풍경이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다. 골목의 온도와 냄새, 낯익은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방학이 되면 친구들과 동네 슈퍼 앞에 모였다. 아이스크림 냉동고를 열면 차가운 김이 얼굴로 확 올라왔다. 100원짜리 쫀드기를 사서 서로 나누어 먹었고, 유리병에 담긴 사이다를 한 모금씩 돌려 마셨다. 슈퍼 주인아저씨는 덥다고 얼음을 손바닥에 쥐여주곤 했다. 그 얼음은 금세 녹았지만, 그 시원함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비 오는 날이면, 집 앞 골목에 고인 물웅덩이를 건너뛰는 게 작은 모험이었다. 장마철 특유의 흙내음과 빗방울이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소리, 비닐우산에 부딪히는 투명한 물방울의 리듬이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그때는 비 오는 날이 지루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시간이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노스탤지어는 개인의 것이지만, 어떤 순간은 세대의 공통 언어가 된다. 학교 종소리, 복도 끝에서 울리던 발자국, 동네 분식집 유리문에 매달린 방울 장식이 내던 맑은 소리, 비 오는 날 가게 앞 포장 비닐이 바람에 펄럭이던 모습. 이런 기억은 나만의 것이 아닌 듯,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겹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나도 그랬어”라고 말한다. 그 순간, 노스탤지어는 과거를 잇는 다리가 된다.

하지만 노스탤지어는 늘 따뜻하기만 한 건 아니다. 그 속엔 작고 선명한 상실이 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 다시 만날 수 없는 얼굴,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웃음. 초등학교 때 매일 함께 놀던 친구가 멀리 이사 갔을 때처럼. 주소도 전화번호도 금세 잊혔지만, 그 친구의 웃는 얼굴과 목소리는 오래 남았다. 그 공백은 아프지만, 그 시절의 빛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몇 달 전, 버스를 타고 가다 창밖으로 낯선 골목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골목이 오래전 내가 뛰놀던 동네와 닮아 있었다. 낮은 담벼락, 고양이 한 마리, 슈퍼 앞에 놓인 음료 상자, 가로등 아래 비스듬히 세워진 자전거. 순간, 버스에서 내려 그 골목으로 걸어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버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 풍경을 뒤로 흘려보냈다. 현재가 과거를 스쳐 지나갈 때, 노스탤지어는 두 시간을 얇은 필름처럼 겹쳐 놓는다.

노스탤지어는 유리병 속의 불빛 같다. 흔들면 빛이 흩어지고, 멈추면 천천히 가라앉는다. 너무 오래 바라보면 눈이 시리지만, 시선을 거둘 수 없다. 그 빛은 결코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잠시나마 손에 쥔 듯한 착각을 준다. 그 착각이야말로 우리를 살게 한다. 사람은 현재만으로 살 수 없다. 과거라는 뿌리가 있어야 오늘이 자라고, 내일이 잎을 틔운다.

어느 날 밤, 창문을 열었을 때 멀리서 라디오 음악이 흘러왔다. 곡명도, 가수도 알 수 없었지만, 그 멜로디는 어린 시절 분식집에서 김이 오르던 떡볶이 냄새와 함께 찾아왔다. 그 순간, 나는 그 시절의 나를, 그 공기를, 그 온기를 동시에 마셨다. 짧았지만, 아주 깊은숨이었다. 그리고 그 숨은 지금의 나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노스탤지어는 우리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때의 공기와 빛, 그리고 나 자신을 다시 느끼게 하는 문이다. 그 문은 언제나 예고 없이 열린다. 우연히 스친 향기, 무심히 들은 노래, 낯선 골목의 색감 하나가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 문틈 사이로, 나는 잃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다시 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 위에, 유일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꽃이 피어 있다. 그 꽃의 이름이, 나에게는 노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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