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는, 가을

빛과 쇠락이 공존하는 계절

by Helia

낙엽이 얼굴에 스쳤다. 바람은 차갑게 불어왔고, 그 순간 나는 가을을 견딜 수 없었다. 눈부시게 빛나던 여름이 저만치 사라진 자리, 계절은 소리 없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햇살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 빛 속에는 이미 쇠락의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가을의 바람은 단순히 공기를 식히는 바람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속 빈틈을 드러내는 바람이다. 창문 틈새로 스며든 한 줄기 바람에 허전함이 쏟아져 들어오고, 잠시 숨 고르던 마음이 금세 흔들린다. 낮은 짧아지고, 저녁은 빠르게 스며든다. 하늘은 높지만 그 아래 나는 점점 작아지는 듯하다.

거리를 걸으면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그것은 나무가 스스로를 버려내는 소리다. 누군가의 발자국에 흩날리며 부서지는 낙엽은 오래된 기억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 같다. 사랑했던 얼굴, 한때는 뜨겁게 웃던 날들, 그리고 끝내 붙잡지 못한 이름들. 바람은 그 모든 것을 끊임없이 꺼내 놓는다. 나는 그것들을 붙잡을 수도, 완전히 놓아버릴 수도 없다.

사람들은 가을을 풍요의 계절이라 말한다. 황금빛 들판, 익어가는 과일, 풍성한 수확. 그러나 그 풍요는 잠시뿐이다. 수확이 끝나면 들판은 텅 비고, 나무는 앙상하게 남는다. 마치 공연이 끝난 무대처럼 화려함 뒤에는 공허만이 기다린다. 충만은 짧고, 허무는 길다. 나는 그 허무를 견디기 어렵다.

가을은 늘 상실을 떠올리게 한다. 역 플랫폼에 서 있던 어느 날, 차가운 바람은 뺨을 스쳤고, 그 사람의 손에는 안개꽃 다발이 들려 있었다. 기차가 떠난 뒤에도 내 기억 속에 남은 건 꽃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그러나 오래 남는 꽃. 그 다발은 이별의 말 대신 건네진 무언의 언어였다. 아름다움이란 본래 덧없음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가을의 견딜 수 없음은 결국 인간의 운명과 닮아 있다. 우리는 쌓고, 사랑하고, 간직하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흩어진다. 아무리 단단히 붙잡아도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가을은 잔인하다. 절정의 빛깔 속에 이미 소멸의 운명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함과 쓸쓸함이 동시에 있는 계절. 그 모순이 바로 인간의 삶이다.

나는 가을만 되면 유난히 사라진 얼굴들이 떠오른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손길, 멀어진 인연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 거리는 낙엽으로 가득 차고, 바람은 무심하게 불어온다. 그 속에서 나는 이름 하나하나를 다시 떠올린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바람에 실려 돌아온다. 그 무게는 때로 감당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가을을 미워할 수는 없다. 이 계절은 가장 견디기 어렵지만, 동시에 가장 선명한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낙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속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꽃은 시들어도 기억은 오래 남고, 바람은 차갑지만 그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가을의 무게가 힘겹지만, 어쩌면 그 무게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을은 묻는다. 무엇을 잃어도 여전히 살아갈 수 있겠는가. 무엇이 사라져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겠는가. 바람 속에서 나는 대답하지 못한 채 묵묵히 걷는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낙엽의 소리가 내 안의 대답처럼 들려온다.

견딜 수 없는 가을, 그러나 그 견딜 수 없음 속에서 나는 나를 마주한다.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계절, 그 모순 속에서 인간은 가장 인간답게 흔들린다. 언젠가 이 감정마저 추억으로 남겠지만, 지금은 그저 이 무게를 있는 그대로 품어야 한다.

낙엽은 흩날리고, 바람은 차갑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올가을, 당신은 무엇을 견디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무게를 어떻게 품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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