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들이 남긴 빛
낡은 서랍을 열다가 먼지 낀 사진 한 장이 손끝에 걸려 나왔다. 순간, 멈춰 있던 시간이 느릿하게 풀리며 내 앞에 쏟아졌다. 그 사진 속 웃음, 배경에 번진 빛, 기억조차 희미했던 날의 공기까지. 나는 알았다. 노스탤지어란 갑작스럽게, 그러나 은밀히 찾아오는 안개 같은 감정이라는 걸.
노스탤지어는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다. 그리움이 특정한 대상에 닿아 있다면, 이 감정은 시간 자체를 향해 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 사라진 풍경과 목소리, 이미 떠난 사람들. 그 모든 것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우리는 그 감정을 노스탤지어라 부른다.
나는 종종 음악을 통해 그 세계로 들어간다. 오래된 드라마 OST, 학창 시절 귀에 꽂고 다니던 가수의 노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교실의 분필가루 냄새와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함께 따라온다. 귤 향 가득하던 겨울밤, 선풍기 날개가 내뿜던 축축한 바람, 운동장에서 내뿜던 하얀 입김까지. 기억은 소리의 틈새에서 흘러나온다.
노스탤지어의 힘은 양날의 칼 같다. 따뜻하지만 아프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 빛난다. 어린 시절의 환희, 이미 세상을 떠난 이의 손길, 사라진 골목길. 그 모든 게 한꺼번에 몰려와 가슴을 울린다. 가끔은 이 감정이 덫처럼 느껴진다. 과거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이 현재를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은 또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어릴 적 바람만 불어도 웃었던 내가 있었기에, 지금도 행복을 꿈꾼다. 나는 여름날의 마당을 떠올린다. 대야 속 수박이 차갑게 식고, 땅거미 내리던 시간. 가진 건 적었어도 마음은 풍족했다. 작은 선물에도 심장이 뛰고, 하늘의 별빛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지금의 나는 지쳤을 때 그 시절의 나를 꺼내어 속삭인다. “넌 이미 행복할 줄 아는 아이였어.”
노스탤지어의 정체는 결국 사라짐에 있다. 사라지고 난 뒤에야 우리는 알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얼마나 깊게 내 삶을 지탱했는지. 떠나간 친구, 철거된 동네, 문 닫아버린 서점, 더는 돌아오지 않는 계절. 그 모든 결핍이 현재를 더 촘촘히 느끼게 한다. 어떤 이는 노스탤지어를 낭비라 말한다. 지나간 시간을 붙들어 무엇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다르게 본다. 그것은 내면을 지켜주는 기억의 벽돌이다. 과거라는 벽돌이 없다면 현재라는 집은 금세 무너진다. 우리는 과거를 그리워하기에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미래로 걸어갈 힘을 얻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 감정은 더 자주 문을 두드린다. 젊을 땐 미래만을 향해 달리느라 뒤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이제는 걸음을 늦추고, 뒤를 돌아본다. 영화처럼 스쳐 가는 장면들―놀이터의 모래바람, 첫사랑과 걷던 골목길, 밤새 듣던 라디오, 낡은 MP3에 담긴 노래들. 그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노스탤지어는 결국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했던 사람, 사랑했던 시간, 사랑했던 풍경. 그것들을 떠올릴 때 우리는 알게 된다. 살아온 길 곳곳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흩어져 있는지를. 설령 끝나버린 사랑일지라도 그 흔적은 내 안에 남아 여전히 나를 지켜준다.
나는 글을 통해 그 감정을 붙잡는다. 글자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내가 걸어 나오고, 이미 떠난 사람들과 대화한다. 오래된 사진이 활자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래서 글은 나에게 또 하나의 노스탤지어다. 사람들은 앞으로만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뒤돌아보는 순간에야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긴다는 걸. 노스탤지어는 그 행위 자체가 주는 선물이다. 과거의 그림자를 어루만지며 빛나는 조각들을 주워 담는 일, 그것이 현재를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든다.
노스탤지어는 인생의 저녁놀 같다. 낮의 빛은 사라졌지만, 하늘은 붉게 물든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번지면서도, 그 빛은 눈부시다. 우리 마음속에서도 지나간 순간들이 노스탤지어라는 이름으로 물들고, 그 빛이 현재의 우리를 따뜻하게 감싼다. 오늘도 나는 서랍을 열어 사진 한 장을 꺼낸다. 그 속의 나는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다. 사진을 덮으며 나는 안다. 그 웃음은 여전히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