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어야 보이는 풍경
노르웨이의 숲을 아세요? 누군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떠올릴 테고, 또 누군가는 비틀스의 기타 선율을 기억할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북쪽 끝 차가운 공기를 머금은 실제 숲의 풍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 그 이름은 책과 노래를 넘어, 살아오며 마주한 방황과 상실, 그리고 다시 숨을 고르던 순간들을 한꺼번에 불러오는 은유다. 나는 처음 그것을 음악으로 알았다. 카세트테이프 속에서 흘러나오던 낮고 은은한 기타의 울림, 이해하지 못한 가사보다도 먼저 다가왔던 건 공기처럼 스며드는 쓸쓸함이었다. 그때 나는 숲을 본 적도, 노르웨이라는 땅을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름만으로도 서늘한 그림자와 안개, 잿빛 하늘과 검푸른 나무들이 상상 속에 펼쳐졌다. 세월이 흘러 책장에서 다시 마주한 ‘노르웨이의 숲’은 오래 묻어둔 기억을 정면으로 불러내듯 다가왔다. 와타나베라는 인물이 걸어가는 길 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고, 사랑은 빛나면서도 불안하게 흔들렸으며, 젊음은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려 애쓰는 몸부림으로 남았다. 소설 속 목소리는 낯설지만 묘하게 친숙했다. 내가 걸어온 숲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숲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길을 잃는 체험과 겹쳐 있다. 빛은 있어도 가려지고, 길은 있어도 선명하지 않다. 숲을 걷는다는 건 결국 자신과 단독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아무리 곁에 사람이 있어도,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은 오직 나 혼자만의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들이 끝내 숲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들은 사랑을 붙잡으려 했지만 흘려보냈고, 상실을 견디지 못해 무너졌으며, 어떤 이는 숲의 어둠 속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러나 방황조차 살아 있음의 증거였다. 삶은 결국 또 다른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니까.
내 청춘도 그랬다. 교복 자락이 바람에 흔들리던 시절, 창가에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홀로 듣던 오후, 일기장에 빼곡히 쏟아낸 감정들,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도 끝내 삼켜야 했던 고백들. 그 모든 순간이 숲 속을 걷는 듯했다. 햇살이 스며들어도 그림자가 더 짙었고,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도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 불안과 서툼 속에서 읽은 ‘노르웨이의 숲’은 내 마음의 거울 같았다. 책장을 넘기며 흘리던 눈물은 단지 소설 때문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 나는 내 숲의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숲은 나를 삼키지 않았다. 오히려 멈춰 서게 만들었다. 상실을 겪을 때마다 숲의 바람은 차갑게 스쳤지만, 그 차가움 속에서 오히려 내 온기를 확인했다. 사랑이 부서지고 관계가 무너져도, 숲은 끝이 아닌 쉼이었다. 멈추어 숨을 고르고 다시 나아갈 수 있도록 품어주는 공간이었다. 방황과 휴식이 한 몸처럼 엉킨 자리, 그것이 내게 숲의 얼굴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 다시 비틀스의 노래를 들으면 예전과는 다른 질문이 들린다. 너는 지금 어떤 숲을 걷고 있느냐, 길을 찾았느냐, 아니면 여전히 헤매고 있느냐. 나는 대답을 망설인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이 있고, 여전히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길을 잃었다는 감각조차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을. 숲을 걷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숨 쉬고, 발자국을 남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길의 끝을 찾지 못해도, 걸어간 흔적이 삶을 증명하니까.
그래서 다시 묻는다. 노르웨이의 숲을 아세요? 이 질문은 결국 되돌아와 나를 향한다. 당신의 숲은 어떤 모습인가. 당신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나. 내 숲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 안에서 나는 길을 잃고, 빛을 만나고, 멈추고, 다시 걸어간다. 숲은 언제나 거기 있고, 나는 그 안에서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길의 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숲을 걷는 그 자체가 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