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

네가 예민해서 그래, 그 말에 무너져간다

by Helia

가족은 나를 품어야 할 울타리였지만, 현실은 철창이었다. 따뜻해야 할 언어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위로라 불리던 말들은 날 묶는 사슬이었다. 내가 힘들다 말하면 “네가 문제야.”라는 목소리가 돌아왔고, 눈물이 흐르면 “별것도 아닌 걸로 예민하다.”라는 조롱이 따라왔다. 그 말들은 돌멩이처럼 쌓여 가슴을 눌렀고, 마침내 내 안에서는 균열이 생겼다. 작은 흠집이던 틈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골로 벌어졌다. 나는 결국 스스로를 향해 칼을 들이댔다. ‘정말 내가 잘못된 걸까? 내가 과민한 걸까?’ 자존감은 그렇게 흘러내리듯 소진됐다.

가스라이팅은 폭풍처럼 휩쓸고 가는 파괴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독이 서서히 퍼지는 것과 같다. 티 나지 않게 스며들어 어느 순간 온몸을 잠식한다. 피해자는 자신이 감옥 안에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그들의 말은 어느새 내 속에 뿌리내렸고, 나는 그 목소리를 내 목소리인 듯 되뇌었다. 사실 나는 예민한 게 아니었다. 다만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연인의 말속에도 그 독은 숨어 있었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라는 말은 애정의 속삭임이 아니라 협박의 변주였다. 잘못을 저질러도 그는 태연하게 책임을 돌렸다. “네가 날 화나게 해서 그렇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사랑을 지키려 스스로를 탓했다. 사랑은 더 이상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족쇄였고, 연인은 보호자가 아니라 감시자였다.

친구의 말에도 날카로움은 배어 있었다. “네가 늘 나 챙기잖아, 그건 네 성격이지.” 농담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내 마음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선언이었다. 내가 지쳐 있다는 말을 꺼내면 “내가 힘든 건 네가 제대로 못해줘서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정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있던 날 선 칼날. 나는 억지웃음으로 넘겼지만, 웃음 뒤에서 마음은 메마른 풀잎처럼 부서져갔다.

직장이라는 공간도 다르지 않았다. 상사는 권위라는 가면을 쓰고 말했다. “이건 네가 부족해서 그래. 네 발전을 위해 말하는 거야.” 잘못은 언제나 내 몫으로 돌아왔고, 죄책감은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다. 선후배 사이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네가 예민하니까 힘든 거지.” 그 말은 내 고통을 미세한 기분 탓으로 축소했고, 결국 내 목소리를 지워냈다. 나는 점점 투명해졌다.

가스라이팅의 본질은 거짓된 거울을 내미는 것이다. 상대는 늘 결함을 내 탓으로 돌렸다. 나는 점점 스스로를 의심했고, 어느새 그들의 말이 내 속에서 울렸다. 나를 무너뜨린 것은 그들의 언어였지만, 더 깊은 상처는 그 말을 내 안에 받아들여 스스로 반복했다는 사실이었다.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네 방향에서 날아든 화살은 내 몸에 꽂혀 서로 얽혔고, 나는 그 무게에 짓눌렸다. 거울 속의 나는 웃고 있었지만, 그것은 억지로 칠해진 분장이었다. 눈빛은 이미 비어 있었고, 미소는 잉크처럼 번져 있었다. 나는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겠다. 그것이 폭력이라는 것을. 사랑이라 불리든, 우정이라 불리든, 권위라 불리든,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그것은 폭력이다. 이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짓밟는다면, 그것은 배려가 아니다. 나는 예민한 존재가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다.

흔들림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오래 각인된 말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때로는 또다시 스스로를 탓하다가 멈칫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그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를 조종하려는 잔향일 뿐, 내 진짜 목소리는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그 말에 나를 내어주지 않는다. 피해자로 남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내 목소리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가스라이팅은 어디에서든 일어난다. 가족의 집 안에서도, 연인의 침묵 속에서도, 친구의 농담 속에서도, 직장의 권위 속에서도. 가까울수록, 신뢰할수록 더 교묘하게 스며든다. 그래서 더욱 무섭다. 그러나 명확히 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는 존중받아야 할 존재다.

이 글은 내 작은 선언이다. 나는 더 이상 가스라이팅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은 내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다시 말한다면, “네가 예민해서 그래.” 나는 단호히 대답할 것이다. “아니, 나는 존중받아야 한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비슷한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가족에게, 연인에게, 친구에게, 직장에서 “네가 예민해서 그래.”라는 말을 듣고 무너진 적은 없는가. 그렇다면 기억하라. 당신이 잘못된 게 아니다. 가스라이팅은 당신의 탓이 아니다. 당신이 목소리를 되찾는 순간, 이미 회복은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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