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밭

흘러내리는 순간

by Helia

모래밭에 들어서는 순간, 세상은 발끝부터 새로 시작된다. 신발을 벗자마자 스미는 그 감촉. 서늘하다가 이내 뜨겁게 달아오르는 모래는 내게 늘 두 얼굴로 다가왔다. 알갱이 하나하나가 작은 불씨 같기도, 오래된 별의 부스러기 같기도 했다. 붙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내려놓으면 어느새 발밑에서 잔잔히 나를 받쳐준다. 모래밭은 늘 그렇게, 흩어지면서도 남아 있었다.

나는 모래밭 위에서 나를 자주 발견한다.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바닷가에 갔다. 삽 대신 두 손을 쓰며 모래성을 쌓았고, 성벽이 조금씩 높아질 때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다. 그러나 그 성은 언제나 쉽게 무너졌다. 파도 한 줄기에도, 바람 한 번에도. 그럼에도 나는 매번 다시 모래를 퍼 올렸다. 완성은 늘 실패했지만, 그 미완의 성은 내 안에서 오래 남았다. 아마도 삶이 그렇지 않을까. 끝내 완성하지 못할지라도,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다.

모래는 단순한 흙이 아니다. 바위가 오랜 세월 깎이고 부서진 흔적이고, 파도와 바람이 남긴 기록이다. 그러니 모래밭 위를 걷는다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세월 위를 걷는 것과 같다. 발자국이 남는 순간은 찰나지만, 그 순간이 쌓여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누군가는 흔적이 금세 지워진다고 허무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지워짐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사라진다는 건 곧 새로운 자리가 생긴다는 뜻이니까.

낮의 모래밭은 눈부시다.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며 수천 개의 거울이 깔린 듯하다. 하지만 밤이 되면 표정이 달라진다. 별빛과 달빛을 머금은 모래는 검은 유리알처럼 빛난다. 같은 모래인데 빛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건 마치 사람 같았다. 상황에 따라 다른 얼굴을 내보이며 살아가는 우리. 낮에는 환히 웃다가도 밤에는 조용히 그림자를 품는 것처럼. 나는 그 모래밭에서 낮의 나와 밤의 나를 동시에 마주한다.

모래 위를 걸으면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스팔트나 자갈길과 달리, 모래는 모든 소음을 삼켜버린다. 그래서일까. 모래밭에 들어서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사색의 공간에 들어선 듯하다. 내 안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온다. 잊고 있던 이름, 미처 꺼내지 못한 말, 오래된 후회 같은 것들이 발밑에서 되살아난다. 모래는 내가 묻어둔 것들을 잠시 꺼내 보여주고, 다시 덮어준다. 그렇게 흘러가듯 사라지게 해 준다.

나는 종종 모래를 한 줌 집어 든다. 손바닥 위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는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과 닮았다. 붙잡으려 하면 더 빨리 흩어진다. 관계도, 추억도, 그와 같았다. 더 세게 움켜쥘수록, 더 빨리 멀어졌다. 그래서 이제는 모래처럼 두기로 했다.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남을 건 남게, 떠날 건 떠나게. 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인생엔 많다는 걸, 모래가 먼저 가르쳐줬다.

바람 부는 날의 모래밭은 또 다르다. 작은 바람에도 수천 개의 모래알이 흩날린다. 그 모습은 마치 바다가 육지 위로 몰래 들어와 춤추는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알았다. 모래밭은 멈춘 듯 보여도 늘 흐르고 있었다. 눈에는 고요해 보이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한다. 나도 그렇다. 변하지 않는 듯 살아가지만, 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었다.

모래 위에 글자를 남겨본 적 있는가. 누군가의 이름, 혼잣말 같은 문장, 그리움의 단어. 그러나 파도가 밀려오면 금세 사라진다. 남은 흔적은 없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분명 존재했다. 나는 그 사실이 오히려 좋았다. 오래 남지 않는다는 건, 언젠가의 상처도 희미해질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바람이 불면, 파도가 덮으면 흐려지고 사라진다. 결국 아무리 선명했던 고통도 모래 위 글씨처럼 옅어질 것이다.

모래밭은 늘 부드럽지만, 그 속은 단단하다. 작은 알갱이 속에 오랜 세월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모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잠시 품어주고, 지나간 흔적을 부드럽게 덮어주는 존재. 겉으로는 유약해 보여도 안으로는 단단한 사람. 손에 잡히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사람.

해가 기울 무렵, 모래밭은 금빛으로 물든다. 노을이 번지면 발밑은 마치 별이 쏟아진 듯 반짝인다. 그때 나는 종종 착각한다. 내가 별을 움켜쥔 것 같다고. 하지만 별도, 모래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 강렬하게 마음에 남는다.

나는 여전히 바닷가에 가면 모래밭 위에서 오래 머문다. 발자국이 남았다가 지워지는 걸 지켜보며, 흘러가는 삶을 떠올린다. 모래는 늘 같은 대답을 한다. “흘러가도 괜찮아. 남으려는 건 남고, 떠나려는 건 떠날 거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문득 묻고 싶어진다. 당신에게 모래밭은 어떤 풍경인가. 지워진 추억인가, 아직 지워지지 않은 발자국인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