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들
그 사람 이름은 잊었는데,
웃을 때 나는 소리만은 또렷하다.
참 이상하지.
얼굴보다 웃음이 더 오래 남다니.
기억은 그런 식이다.
말하지 않아도, 다시 꺼내지 않아도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불쑥 튀어나온다.
향기 하나에, 멜로디 한 줄에,
혹은 아무도 없는 골목길 풍경 하나에.
조각.
기억은 파편처럼 날아다닌다.
제멋대로 깨어지고 흩어져 있다가
언제부턴가 하나씩 내 안에 박힌다.
때론 따갑고,
때론 따뜻하고,
때론 아프도록 반짝인다.
기억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여름이었다.
정확히는, 여름이 끝나가는 어느 저녁.
나는 골목 어귀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손에 들린 건 반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다른 손으론 코끝을 훔치고 있었다.
울다 멈춘 직후의 표정.
목에 맴돌던 말은 끝내 삼켜졌고,
아무도 듣지 못할 사과만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날 해는 유난히 천천히 졌다.
하늘은 붉은 듯 보랏빛이었고,
내 그림자는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어느 순간,
나는 그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거란 걸 알았다.
기억은 사진보다 오래간다.
사진은 색이 바래지만
마음에 찍힌 장면은 희미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누군가와 웃었던 장면보다
울지 않으려 애썼던 순간이 더 오래 남는다.
한없이 가벼웠던 말보다
끝내하지 못했던 말이 더 무겁게 가슴에 남는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못 했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같이 있던 그 시간 내내 가슴속에만 담아두고,
돌아서자마자 후회했던 그 말들.
이젠 전하지 못할 말들이 되었다.
사람은 사라졌지만,
감정은 살아남았다.
말은 늦었고,
기억만이 유일한 대답이 되었다.
가끔은 아무렇지 않은 듯 지냈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았던 적은 없다.
나는 그날 입었던 옷 색까지 기억한다.
그 사람이 마셨던 음료,
문득 잡았던 손의 온도,
우리가 앉았던 벤치의 나뭇결까지.
누군가에겐 아무 의미 없는 풍경이
나에겐 인생을 갈라놓은 장면이었다.
사람은 잊는 존재라지만,
진짜로 잊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그냥, 덜 아파지는 것뿐.
어떤 기억은 냄새로 돌아온다.
이불에 스며든 햇빛 냄새,
엄마가 끓이던 미역국 향기,
그 사람이 쓰던 샴푸 향.
가끔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혹은 거리의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그 냄새가 스칠 때가 있다.
그 짧은 순간.
심장이 멎는다.
모든 게 멈추고,
오로지 그때로 돌아간다.
코끝이 먼저 울고,
가슴이 따라 웅크린다.
기억은 시계가 아니다.
앞으로만 가지 않는다.
향기 하나로, 표정 하나로
과거로 미끄러져 돌아간다.
사진도 꺼내본다.
거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 내 연락처에 없다.
하지만 웃고 있다.
그 웃음들이, 나를 울린다.
그땐 몰랐다.
그 순간이 그렇게 소중할 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줄.
웃고 있는 네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말한다.
“너, 참 밝았구나.”
“그때, 참 좋아했었구나.”
“아무것도 몰랐구나.”
나는 아직도 그 벤치를 지나칠 때면
괜히 고개를 돌린다.
혹시 앉아 있을까 봐.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자리에 자꾸 눈이 간다.
어떤 장소는 기억을 품는다.
사람이 떠나도,
풍경이 바뀌어도,
기억은 거기에 남아 있다.
나는 그곳을 피하지 않는다.
피한다고 지워지는 게 아니니까.
오히려 자주 걷는다.
그 길에서
그 시절의 나를 껴안기 위해.
기억은 감정의 지도다.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디에서 멈췄으며
무엇을 놓쳤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기억은 구겨진 편지 같고,
어떤 기억은 접힌 종이학 같고,
어떤 건
이미 찢어져버린 낙엽 같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걸
주워 모으고 있다.
다시 붙이고,
조심스레 펴고,
한 장씩 손바닥 위에 올려두며
‘아직 괜찮다’고,
‘지나간 건 지나간 대로 아름답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가장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
결국 나를 키웠다.
가장 잊고 싶었던 사람이
끝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상처는 시간이 지운 게 아니라,
내가 안고 걸었기에 옅어진 것이다.
나는 이 기억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미숙했든,
얼마나 흔들렸든,
그게 내가 살아낸 증거니까.
그리고 이제는 안다.
기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내가 누군가의 기억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내 말, 내 눈빛, 내 뒷모습.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사람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물들일 수도 있다.
그러니 더 조심하고,
더 진심으로 말하고,
더 많이 웃고 싶어진다.
마지막으로, 나는 바란다.
언젠가 내 인생이 조용히 끝나는 날이 온다면
누군가의 마음에
내가 따뜻한 조각 하나로 남아 있기를.
누군가의 기억 속 벤치에서
조용히 웃고 있는 사람으로
아무 말 없이,
아무 미련 없이,
그렇게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