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실패가 아니라 성장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이 끝나면 세상도 끝나는 줄 알았다. 누군가와 나눈 웃음, 함께 들었던 음악, 같은 공간을 공유했던 기억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때, 나는 그 모든 순간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감당하지 못했다. 영화 <500일의 서머>는 바로 그 무너짐을 낱낱이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묻는다. 사랑이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시간이 의미 없는 것이 될 수 있느냐고.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춰 서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한 번쯤 톰이었다. 누군가를 만나 단숨에 마음이 쏠리고, 그 사람을 세계의 중심으로 삼아버리는 사람. 썸머를 처음 본 순간, 톰은 빠져든다. 그녀의 파란 눈, 특유의 음악 취향, 말끝마다 묻어나는 자유로운 공기. 사랑의 시작은 늘 그렇게 갑작스럽고도 강렬하다. 상대의 웃음 하나에도 의미를 과장해서 부여하고, 평범한 대화가 운명처럼 느껴진다. 마치 우연히 들어온 노래가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 들릴 때처럼, 사랑은 삶의 모든 디테일을 새롭게 물들이며 우리를 흔든다.
그러나 사랑의 시작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것은 그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다. 영화 속에서 톰이 파티에 가는 장면을 떠올린다. 화면은 두 개로 나뉘어 한쪽에는 그가 꿈꾸는 달콤한 재회가, 다른 한쪽에는 실제로 벌어지는 차가운 현실이 펼쳐진다. 기대 속에서 그는 썸머와 웃으며 대화하고 옛 정이 되살아나길 바라지만, 현실 속에서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약혼자가 되어 있다. 관객은 그 장면을 보며 마음속 깊이 아프게 공감한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메시지 답장이 늦어지면 온갖 상상을 하고, 작은 무관심에도 상처를 받아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늘 두 개의 화면으로 재생된다. 기대와 현실. 그리고 대개 현실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냉정하다.
많은 사람들이 썸머를 ‘차가운 여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녀가 가장 정직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처음부터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고, 관계에 이름 붙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저 순간을 즐기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다. 썸머는 한 번도 자신을 포장하지 않았다. 비겁하게 숨지도 않았다. 문제는 톰이었다. 그는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었다. 그녀의 솔직한 고백은 그의 귀에 닿지 못했고, 그는 그녀의 그림자 위에 자기 환상을 덧칠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랑을 그렇게 오해하는가. 상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이상형으로 그려놓은 뒤, 거기에 맞지 않는 부분은 애써 외면한다. 결국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에 가깝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톰은 하루하루 무너져간다. 함께 갔던 장소는 고통이 되고, 함께 들었던 노래는 가시가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고통은 형태를 바꾼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과정을 통해 그는 건축이라는 원래의 꿈을 다시 붙잡는다. 썸머와 함께한 시간은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게 만든 과정이었다. 사랑이란 그렇게 우리를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더 나은 쪽으로 이끌기도 한다.
<500일의 서머>의 ‘500일’은 특정한 연애 기간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나 겪는 사랑의 사이클을 상징한다. 설레는 시작, 달콤한 한가운데, 균열이 생기고 끝이 오는 과정, 그리고 그 뒤에 남는 성장.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500일이 있다. 어떤 이는 짧고 뜨겁게, 어떤 이는 길고 천천히. 하지만 공통점은 있다. 그 시간이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계절은 반드시 온다는 것.
이 영화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누구나 톰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썸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에게 환상을 덧씌우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냉정해 보이는 입장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사랑을 시작하고 끝내며, 그 과정 속에서 단단해진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문을 열고 새로운 사람을 마주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썸머가 지나고 어텀이 시작되는 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한 메시지다. 사랑이 끝나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의 문턱이다.
나 역시 언젠가의 500일을 기억한다. 어떤 계절에 시작되어, 다른 계절에 끝나버린 사랑. 그 끝에서 나는 울었고, 무너졌고, 다시 일어났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과정이 실패가 아니라 성장이라는 것을. 그래서 지금은 안다. 사랑은 정답을 맞히는 시험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여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왜 늘 썸머를 만나고 어텀을 기다릴까. 아마도 사랑이란 계절 같아서일 것이다. 여름처럼 뜨겁게 다가왔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곧 가을처럼 새로운 공기가 찾아온다. 그 순환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고, 더 단단한 내가 된다. 그러니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또 다른 계절은 반드시 다가오기 때문이다.
당신의 500일은 어떤 계절에 머물러 있나요? 지금의 당신은 톰일까요, 썸머일까요, 아니면 어쩌면 이미 새로운 톰을 마주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