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배달앱을 켰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by Helia

어제도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햄버거였다. 끊겠다고 다짐한 게 불과 2주 전인데, 손은 여지없이 배달앱을 켰다. 오늘만, 이번만, 딱 한 번만. 그렇게 합리화를 해도 이미 나는 주문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주말에도 떡볶이를 시켜 먹었는데, 오늘은 또 햄버거가 먹고 싶어졌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라기보다 마음이 허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 앞에 놓인 비닐봉지를 받아 드는 순간은 작은 선물을 받는 것처럼 설레는데, 포장 용기를 열고 한입을 베어 물면 묘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바삭한 패티와 녹아내리는 치즈, 달짝지근한 소스가 혀끝을 채울 때, 잠시나마 공허가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문제는 늘 그다음이다. 포만감이 차오른 자리에 죄책감이 몰려온다. 또 시켜 먹었네, 또 못 참았네. 그 순간 나는 스스로를 탓하며 한숨을 내쉰다. 짧은 위로와 긴 후회, 그게 지금의 나다.

오늘은 특히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었다. 운동도 하지 않았다. 산책도 나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무기력했고, 몸은 침대에 붙어버린 것처럼 무거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와중에 집안일은 다 해냈다. 빨래를 돌리고, 청소기를 밀고, 먼지를 닦았다. 할 일은 모두 해냈지만, 마음은 여전히 허전했다. 몸은 움직였는데, 마음은 늘어진 채였다. 그래서 더 우울했다. 이렇게 해냈는데 왜 이렇게 공허할까. 나는 오늘을 실패한 날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버텨낸 날이라고 불러야 할까.

라면도 끊어야 하고, 빵이나 튀김도 줄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하지만 다짐은 쉽게 무너진다. 다짐과 충동 사이에서 나는 늘 흔들린다. 라면은 자극적이고, 빵은 달콤하고, 튀김은 바삭하다. 그 맛들이 단순히 입을 즐겁게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틈새를 채우는 역할을 한다는 걸 안다. 그러니 결국 싸워야 하는 건 음식이 아니라 내 마음일지도 모른다. 배달음식을 끊는다는 건 단순히 건강이나 다이어트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위로할 것인가의 문제다.

햄버거를 시켜 먹었던 순간을 돌이켜 보면, 나는 배고프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공허했을 뿐이다. 햄버거는 그 공허를 잠시 잊게 해주는 도구였다. 따뜻한 포장 용기를 열 때 느껴지는 김, 기름진 냄새, 그것들은 잠깐이나마 외로움을 덮어주었다. 그러나 다 먹고 난 뒤 남는 것은 결국 배부름과 죄책감뿐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동시에 더 깊은 자책에 빠졌다. 나를 위로하는 방식이 곧 나를 탓하게 만드는 방식이 되는 순간, 씁쓸함이 몰려왔다.

그러나 오늘을 조금 다르게 기록해보려고 한다. 나는 운동을 하지 않았고, 산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일을 했다. 빨래를 했고, 청소를 했고, 집을 정리했다. 무기력했지만 동시에 성실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서도 할 일을 다 해냈다. 이건 분명 성과다. 사람 마음은 늘 부족한 부분만 바라보기에, 나는 하지 못한 것에만 집착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해낸 것을 적어 내려가면, 오늘은 완전히 무너진 하루가 아니라, 버텨낸 하루로 남는다.

나는 늘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이 정도도 못 참으면 안 된다고,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해야 한다고, 배달은 이제 끝내야 한다고. 그러나 정말 그 모든 걸 완벽하게 지켜내야만 괜찮은 하루일까. 오늘 같은 날, 그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사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다짐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중요한 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려는 마음, 그리고 그 사이에도 여전히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나는 배달앱을 켰다. 다짐을 어겼고, 스스로를 탓했지만, 동시에 살아냈다. 집안을 돌봤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나는 실패한 걸까, 아니면 버텨낸 걸까. 나는 이렇게 결론 내리고 싶다. 실패가 아니라 버팀이라고. 그리고 이 글을 쓰며 묻고 싶다. 당신은 오늘 어떻게 버텼는가. 혹시 나처럼 작은 위로에 기대며 하루를 통과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괜찮다. 우리는 다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으니까. 오늘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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