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올해도 남은 건 석 달, 그 시작은 10월 1일

by Helia

10월 1일. 달력에 붉게 표시된 숫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계절의 체온이 달라진다. 뜨거운 여름이 기어이 뒤로 물러나고, 낯선 바람이 골목마다 서성인다. 햇살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한층 누그러져, 마치 오래된 친구가 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듯한 온기를 남긴다. 이 날이 되면, 나는 유난히 마음이 흔들린다.

9월의 끝자락은 늘 부산하다. 가을이 오는 줄 알면서도 아직 여름의 습기를 벗지 못해 뒤숭숭하다. 하지만 10월 1일은 다르다. 계절의 문이 확실하게 닫히고, 또렷하게 다른 공기가 창문을 열자마자 들어온다. 사람들은 괜스레 옷장을 뒤적이며 두툼한 옷을 꺼내고, 편의점 진열대에는 따뜻한 캔커피가 하나둘 등장한다. 이 변화의 한가운데 서면 나는 늘 묘한 기분이 된다. 새로움을 향한 설렘과, 지난 계절을 보내야 하는 쓸쓸함이 동시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10월 1일은 단순히 국군의 날이었다. TV 속에서는 대규모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전투기가 파란 하늘에 곡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어린 나는 그 장면이 신기해 한참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흩뿌려지는 연기와 구호가 어린 마음을 흔들었지만, 그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바람 냄새였다. 운동장에서 불어오던 가을바람, 낙엽이 바스락거리던 소리. TV의 장엄한 장면보다도 내 곁을 스쳐간 그 바람이 오히려 진짜 10월 1일 같았다.

성인이 된 후의 10월 1일은 조금 더 무겁게 다가왔다. 한 해의 세 번째 분기가 끝났다는 뜻이고, 그만큼 다시금 삶의 시계를 조율해야 하는 날이었다. "올해도 석 달 남았네"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면, 문득 지난날들이 뒤 돌아 보인다. 이루지 못한 계획들, 미뤄둔 약속들, 흘려보낸 시간들이 낙엽처럼 발밑에 쌓인다. 10월 1일은 그래서 내게 달력 위의 경고음 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달려보라는 무언의 신호.

10월 1일의 하늘은 늘 높다. 여름 동안 눌려 있던 구름이 어디론가 흘러가 버린 듯, 드높고 청명하다. 그 하늘 아래서 나는 묘하게 작아진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선 작은 존재라는 걸 실감하면서도, 동시에 그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해방감을 얻는다. 어쩌면 인간은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을 새로 고치는 지도 모른다. 10월의 하늘은 그 고침을 가장 완벽하게 허락해 주는 장치다.

나는 10월 1일을 일종의 ‘심리적 새해’로 여긴다. 1월 1일이 지나면 다짐이 무겁게 느껴지지만, 10월 1일은 가벼운 시작처럼 다가온다. 더 이상은 미루지 말자는 다짐을 하기에도,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기에도 적당한 시각. "아직 세 달이나 남았어"라는 위안과 "이제 세 달밖에 안 남았어"라는 조바심이 동시에 어깨를 두드린다. 이 이중적인 감정이 나를 자극해, 다시 살아보게 만든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어느 10월 1일이 있다. 몇 해 전, 그날 나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했다. 상대는 담담히 말을 꺼냈고,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밖에서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은행잎이 흩날리며 내 발끝을 스쳤다. 그날의 하늘은 유난히 높았고, 나는 그 넓음을 견디지 못해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은 10월을 ‘가을의 초입’이라고 불렀지만, 내게 그날은 ‘가을의 낙하’였다. 하강하는 마음을 다잡지 못해 한동안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이별 역시 계절의 한 과정이었다. 여름의 뜨거움이 지나야 가을의 서늘함이 오듯, 사랑의 열기가 꺼져야 비로소 혼자의 고요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뒤로 10월 1일은 내게 더 이상 단순한 날짜가 아니다. 내가 무엇을 잃었고, 또 무엇을 얻었는지 기억하게 하는 기념일이 되었다. 슬픔과 고요가 나란히 놓여 있는 달력의 첫 장. 매해 이 날이 오면 나는 묻는다. "너는 올해 어떤 계절을 살았니?" 대답은 매번 다르지만, 그 질문 자체가 나를 살게 한다.

10월 1일의 풍경은 도시마다 다르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바람이 거칠게 불며 파도가 더 높이 일고, 산골에서는 단풍이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다. 도시의 거리에서는 아이들이 긴팔 옷을 입고 뛰놀고, 카페 앞 테이블에는 따뜻한 음료가 올라온다. 계절이 같은 듯 달라지고, 그 차이를 발견하는 일은 작은 즐거움이 된다. 나는 종종 사진기를 들고 10월 1일의 풍경을 담는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 낙엽이 덮은 인도,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 그 모든 것들이 계절의 첫날을 증명한다.

10월은 또한 추석과 맞물리곤 한다. 가족이 모여 밥을 나누고, 조상 앞에 절을 올리는 풍경이 펼쳐진다. 10월 1일이 추석이던 해에는, 나는 친척들과 모여 송편을 빚으며 웃었다. 손에 쌀가루가 묻어도 신기하게 마음은 가벼웠다. 그날은 낙엽처럼 흩어졌던 우리 가족이 잠시 모여 다시 둥근 원을 이루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내겐 10월 1일은 가족을 불러내는 날짜이기도 하다.

이제 곧 또 하나의 10월 1일이 다가온다.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채 또다시 묻는다. "이번에도 늦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질문 속에서 나는 안다. 계절은 늘 제시간에 도착하고, 나는 늘 조금 늦더라도 결국 따라간다는 것을. 10월 1일은 그래서 나를 재촉하는 날이면서도 동시에 안심시키는 날이다.

만약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날짜가 언제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10월 1일이라 말할 것이다. 단순히 계절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이 날짜가 내 삶을 수없이 뒤돌아보게 하고 다시 걷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름의 뜨거운 숨결을 떠나보내고, 가을의 차가운 바람을 맞이하며, 그 경계 위에 서 있는 날.

오늘도 나는 달력을 본다. 그리고 숫자 ‘1’ 옆에 작은 메모를 남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매해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그 반복 덕분에 나는 살아간다. 10월 1일은 내게 언제나 시작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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