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피보다 진한 약속

by Helia

나는 홀연히 떠났다. 사랑을 묻은 산을 뒤로한 채, 되돌릴 수 없는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등을 미는 듯했으나, 가슴은 무너진 돌더미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싸움은 분명 현생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피가 튀고 칼이 부딪히던 순간, 현실은 갈라졌다. 발밑은 전생의 계단이었고, 등대의 심연이 우리를 집어삼켰다. 형은 그곳에서 쓰러졌고, 하랑도 끝내 숨을 거뒀다. 나는 그녀를 안아 산길로 향했다. 전생의 무대에서 시작된 비극을, 현생의 품으로 끌어안은 채.

산바람은 서늘했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차가웠다. 발밑의 낙엽이 바스락거릴 때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겹쳐 들렸다. “현조.” 부르던 목소리, 화내던 목소리, 마지막에 내뱉던 떨림까지—모두 바람에 흩날렸다.

나는 산 중턱 바위 아래 자리를 골랐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좋아하던 곳. 풀잎은 이슬에 젖어 반짝이고, 들꽃은 바람에 흔들렸다. 마치 그녀의 미소가 아직 머물러 있는 듯했다.

나는 맨손으로 흙을 파냈다. 손톱이 부러지고 피가 배어 나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피로 파는 무덤, 그 자체가 약속이었다. 전생의 사랑을 현생의 무덤에 묻는 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지킴이었다.

돌을 쌓아 작은 무덤을 만들었다. 꽃 한 송이를 올려두자, 바람이 살며시 흔들었다. 나는 무덤 앞에 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해가 산마루를 넘어올 때까지, 그녀와 나눈 기억이 환영처럼 스쳐갔다. 웃음과 눈물, 다툼과 포옹, 그리고 잃어버린 아이의 울음까지.

마침내 나는 무덤 위에 손을 얹었다. “하랑, 네가 말했던 그 부탁… 다른 결말을 만들라는 말. 내가 지킬게.” 손바닥의 흉터가 벌어지며 피가 떨어졌다. 그 붉음은 약속의 낙인처럼 무덤 위에 스며들었다. 피보다 진한 약속. 이제 내 심장은 그녀의 이름으로 뛰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긴 그림자가 뒷모습에 드리워졌다. 무덤을 향해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꽃잎 하나가 바람에 흘러내려 내 어깨에 닿았다. 마치 그녀의 손길 같았다.

천천히 산길을 내려섰다. 발걸음이 무겁게 이어질수록, 세상이 다시 변하고 있었다. 균열로 찢겼던 전생의 무대가 뒤로 사라지고, 현대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차가운 아스팔트, 멀리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아침을 여는 사람들의 발자국. 나는 다시 현생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깨달았다. 무덤은 산에 남겨졌어도, 심연은 나를 따라왔다. 산 아래 골짜기에서 검은 그림자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흉터에서 배어 나온 피가 다시 손바닥을 적셨다. “하랑, 네가 없지만… 네가 남긴 약속이 나를 걷게 한다. 나는 멈추지 않겠다.”

새벽빛이 도시 위로 번져갔다. 그러나 그 빛 아래 드리워진 내 그림자는 끝없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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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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