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끝과 시작

by Helia

그러나 그 빛 아래 드리워진 내 그림자는 끝없이 길어졌다.
나는 산을 내려오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전생의 계단과 균열은 어느새 사라지고, 눈앞에 펼쳐진 건 차가운 아스팔트와 도시의 풍경이었다. 심연의 싸움은 전생의 무대에서 끝났지만, 상실은 현생까지 따라왔다.

하랑은 없다. 이 사실은 돌처럼 차갑게 가슴 한가운데 박혀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눈빛과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다른 결말을 만들어.

나는 그 부탁을 약속처럼 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약속은 내 삶을 붙잡는 유일한 힘이 되었다.

현생에서의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쌓였고, 모니터 불빛이 눈을 아프게 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하랑이 이루고자 했던 꿈,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길을 대신 걷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바라보던 세상을 내 눈으로 보고, 그녀가 쓰고 싶어 했던 이야기를 내 손으로 써 내려가기 위해.

가끔은 버거웠다. 숨이 막히도록 쉴 틈 없는 하루가 이어졌다. 하지만 멈추고 싶을 때마다 무덤 앞에 남겼던 약속이 떠올랐다. 피보다 진한 약속. 심장은 멎었어도, 그 약속은 여전히 내 안에서 뛰고 있었다.

밤이 깊어 혼자가 되면, 나는 창가에 앉아 속삭였다. “하랑, 네 몫까지 내가 살아내고 있어. 네가 그토록 원했던 세상을 내가 대신 이루고 있어.” 눈물이 번지면 웃으며 지워냈다. 울음은 그녀의 것이었고, 웃음은 내 몫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날은 유리창에 비친 내 뒷모습 속에서, 또 다른 얼굴이 겹쳐 보였다. 형의 웃음 같기도 했고, 심연의 그림자 같기도 했다. 죽음으로 끊어낸 줄 알았던 굴레가 여전히 내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나는 알았다. 심연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내가 숨 쉬는 이곳, 하루를 버텨내는 이 자리에도 스며 있다는 것을.

그래서 더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하랑의 꿈을 대신 이루는 일이 곧 심연을 거스르는 길이라 믿었다. 그녀가 꿈꾸던 세상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으니까. 나는 피로 약속했고, 지금은 땀으로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끝은 이미 찾아왔다. 하랑의 죽음으로, 형의 몰락으로. 그러나 그 끝은 시작이기도 했다. 남겨진 자의 몫, 약속을 품은 자의 길. 나는 그 길 위에서 오늘도 흔들리며 걷고 있었다.

새벽의 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눈부신 햇살이 책상 위를 덮었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하랑, 네가 그토록 원하던 세상, 내가 끝까지 볼게.”

그러나 그 순간, 문득 서류 사이에서 낯선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손이 심장을 대신한다.

등대의 벽에 새겨졌던 그 문장이, 어떻게 현대의 서류 속에 스며든 걸까? 나는 숨을 삼켰다. 심연은 여전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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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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