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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숨의 틈에서

by Helia

숨을 고르라며 내 어깨를 감싸던 너의 손끝이 아직 남아 있다.
그 손길이 내 온몸의 진동처럼 번졌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온도. 그 모호한 온기가 이상하게 나를 진정시켰다.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뱉어, 날 따라 해.”
네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나는 그대로 따라 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 걸린 ‘잠시’의 틈. 그곳에 우리 둘만 남았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초침은 여전히 움직이는데, 세상의 소음이 멀어지고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나는 네 눈을 봤다. 깊은 우물 같았다. 빠져나올 수 없는 투명한 고요.
너는 내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잠시만, 내게 시간을 줘.”
그 말이 칼날처럼 날아와 내 가슴을 베었다.
잠시라는 말은 언제나 위험하다. 짧다고 믿지만, 그 짧음 속엔 영원이 숨어 있다.

나는 네가 떠날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보내면, 네가 정말 사라질 것 같았다.
한순간의 눈 깜빡임 사이로도 사라질 것만 같아, 나는 너를 붙잡았다.
“이대로 널 못 보내.”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올 때, 이미 세상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았다. 가을 저녁의 냄새가 났다.
마른 낙엽과 먼지, 오래된 벽돌에 밴 햇빛 냄새. 그 모든 게 뒤섞여 폐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쉬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너의 얼굴이 희미해졌다.

기억 속 너는 늘 조용했다.
하지만 조용함 속에서 나는 너의 모든 말을 들었다.
아무 말이 없어도, 눈빛이 먼저 움직였다.
그 눈빛이 나를 꿰뚫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공기, 그때의 빛, 그때의 너. 모든 것이 ‘잠시’였지만, 그 잠시가 내 전부였다.

사람은 가끔 잠시의 순간에 인생을 걸기도 한다.
오래된 약속보다도, 짧은 눈빛 하나에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기기도 한다.
우리의 관계도 그랬다.
끝나버릴 걸 알면서도, 끝까지 머무르고 싶었다.
그건 미련이 아니라, 애틋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날의 하늘은 유난히 낮았다.
손을 뻗으면 구름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하늘은 잡히지 않았다. 마치 너처럼.
가까워질수록 멀어지고, 붙잡을수록 흩어졌다.
나는 그 거리를 견디지 못해, 자꾸 숨을 길게 내뱉었다.
숨이란 결국 버티기였다. 사라지는 것을 붙잡는 최소한의 저항.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보냈다.
완전한 이별이 아닌, 서서히 물러나는 듯한 작별.
너는 돌아서며 말했다. “곧 올게. 잠시만.”
그 말이 내게는 영원의 약속처럼 들렸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는 그렇게, 영원으로 바뀌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뀌었을까.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또 왔다.
시간은 흘렀지만, 너를 떠올리는 일은 늘 ‘잠시’의 반복이었다.
길을 걷다 네가 좋아하던 향을 맡으면, 심장이 미세하게 떨렸다.
TV에서 듣던 음악 한 소절에도, 문득 숨이 막혔다.
사람들은 그런 걸 추억이라 부르지만, 내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대화였다.

나는 종종 하늘을 본다.
네가 머물던 자리에 아직 그 하늘이 있을까 싶어서.
노을이 질 때면 그 빛이 너의 온도 같다.
붉고, 서늘하고, 조금 슬프다.
그 빛 속에 잠시 서 있으면, 세상이 잠깐 멈춘 듯하다.
그게 내가 살아 있는 증거 같았다.

사랑은 언제나 잠시의 언어로 남는다.
“조금만 더”, “이 순간만”, “잠시만.”
그 잠시들이 모여 영원을 착각하게 한다.
우리는 그 착각 속에서 서로를 붙잡고,
붙잡은 손이 미끄러질 때마다 비로소 진짜 시간을 느낀다.

어쩌면 영원이란 건 애초에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수많은 ‘잠시’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신기루 같은 것.
우리는 그 신기루 속에서 울고 웃고,
때로는 이별마저 아름답게 포장한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것들을 잃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오래 남은 건 ‘멈춤의 감각’이었다.
모든 게 흘러가는 와중에도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법.
그게 네가 내게 남긴 유일한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 예전처럼 울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그 사이에 ‘잠시’를 하나 만든다.
그 잠시가 나를 지켜주니까.

밤이 깊어질수록, 너는 자주 꿈에 나타난다.
말 한마디 없이, 웃고만 있는 얼굴로.
그 미소 하나에 나는 또 깨어난다.
잠시였지만, 그 순간의 따뜻함이 현실보다 진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시간이 모든 걸 잊게 한다고.
하지만 나는 안다.
시간은 잊게 하는 게 아니라, ‘잠시’라는 껍질로 감싸줄 뿐이라는 걸.
그 안에 감정은 여전히 살아 있고, 언젠가 다시 깨어난다.

나는 오늘도 숨을 들이마신다.
네 이름이 입안에서 천천히 맴돈다.
소리 내면 사라질까 봐, 입술을 꼭 다문다.
그래서 나는 네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대신 공기를 삼킨다. 그게 너의 흔적이니까.

창밖의 바람이 커튼을 밀어 올린다.
흰 커튼이 물결처럼 흔들린다.
그 속에서 잠시, 네가 서 있는 듯했다.
나는 다시 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이 너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시간이 멈출 수 있다면, 딱 이 순간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아무 소리 없이 멎고, 공기조차 숨을 죽인 채.
그 사이에서 너와 나,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그림.
그게 내가 꿈꾸는 ‘영원’의 모양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흘러간다.
시계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제 갈 길을 간다.
그래서 나는 또 ‘잠시’를 만든다.
길을 걷다 멈춰 서고,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그 잠깐의 멈춤이, 내게는 다시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잠시만.”
그 말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울린다.
다시 듣는다면 나는 또 흔들리겠지.
하지만 이제는 안다.
잠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짧은 순간이 내 안에서 오래 숨 쉬고 있다는 걸.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내쉰다.
그 단순한 행위 안에, 너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이 내게 닿을 때마다, 나는 살아난다.
잠시지만, 아주 깊게.
그 잠시가 내 전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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