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살고 싶다는 말의 다른 이름

by Helia

죽고 싶다는 마음은, 어쩌면 살고 싶다는 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정말 죽고 싶어서 그런 말을 내뱉는 게 아니라,
살고 싶은데 더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을 때 그 문장을 꺼내놓는다.
그건 절망이 아니라 구조 신호다. “살려달라”는, 마지막 남은 온기다.

나는 그 사실을 꽤 늦게 알았다.
그때의 나는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얼굴로 하루를 버텼다.
웃음도, 밥도, 잠도, 사람도 모두 무의미했다.
눈을 감으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눈을 감는 동안에도 세상은 여전히 떠들고 있었다.
그 소음이 나를 세상 밖으로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밤마다 ‘그만두자’와 ‘조금만 더 버티자’가 내 안에서 싸웠다.
심장은 매일 전쟁을 치렀고, 그 사이에서 나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말하는 순간, 누군가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침묵 속에서 천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깨달았다.
정말 죽고 싶었다면, 나는 이미 여기에 없었을 것이다.
그날 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나는 속삭였다.
“살려줘.”
그건 분명 죽음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삶으로의 간절한 외침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순간 삶의 바닥을 친다.
누군가는 그 바닥을 딛고 다시 일어서지만,
누군가는 그 바닥을 끝이라 믿고 고요 속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어쩌면 그 바닥은 ‘끝’이 아니라 ‘시작점’ 일지도 모른다.
더는 내려갈 곳이 없을 때, 오히려 위를 볼 수밖에 없게 되니까.

나는 그때, 세상이 내 편이 아니라는 확신 속에 살았다.
누구에게 말을 걸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대답을 기다릴 용기도 없었다.
누군가 다가와 “괜찮아?”라고 묻는다면 울어버릴까 봐,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건 체념이 아니라, 미안함이었다.
내가 힘든 걸 말하면 그 사람이 더 힘들어질까 봐.
그렇게 나는 점점 더 조용해졌다.

그 무렵, 어떤 친구가 보낸 짧은 메시지가 있었다.
“요즘 괜찮아?”
단 세 글자. 하지만 그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죽음보다 삶 쪽으로,
한 발자국씩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유는 대단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였다.
살고 싶은 이유는 늘 그렇게 사소한 데 숨어 있다.

사람은 흔히 ‘죽고 싶다’는 말을 금기시한다.
하지만 그건 부끄러운 말이 아니다.
그건 SOS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내뱉는 마지막 공기 같은 것.
그 말을 들었다면,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 한 손이, 한 문장이, 한 눈빛이
누군가의 인생을 되돌릴 수도 있다.

나는 이제 안다.
극단적인 충동은, 삶이 완전히 꺼진 상태가 아니라
살고 싶다는 불씨가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다.
그 불씨는 작고 약하지만, 분명히 살아 있다.
문제는 그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켜볼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빛을 향해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
그 손이 있을 때 사람은 다시 살아난다.

어느 날 나는 길을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을 끝자락의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다.
그 순간, 생각했다.
죽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도,
사실은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죽음은 끝이지만, 죽고 싶다는 말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 말 안에는 “나 아직 여기 있어”라는 속삭임이 숨어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그럴 것이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고,
모든 게 허무하고,
도저히 내일을 맞이할 용기가 없는 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속삭인다.
“괜찮아, 오늘만 버티자.”
그 말은 기적처럼 내일로 나를 데려왔다.
기적은 늘 거창하지 않았다.
단지 오늘을 버텨내는 것, 그게 기적이었다.

나는 여전히 완벽히 행복하지 않다.
가끔은 여전히 흔들리고,
가끔은 또다시 사라지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마음이 찾아올 때마다
내 안 어딘가에서 ‘살고 싶다’는 목소리가 함께 일어난다는 것을.
그 두 마음이 싸우는 동안,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건, 아직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죽고 싶을 때, 나는 살아 있었다.
살고 싶어서 울었고, 살고 싶어서 포기하려 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부끄럽지 않다.
그건 생을 더 절실히 느끼는 다른 방식이니까.
그러니 누군가의 “죽고 싶다”는 말 앞에서
우린 그를 탓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그건 “살고 싶다”는 고백이니까.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예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때의 너는 잘 버텼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언젠가 또다시 어두운 밤을 맞이하겠지만
그때마다 기억할 것이다.
죽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살고 싶다는 신호라는 것을.

삶은 그렇게 끝과 시작이 맞닿아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삶을 배운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깨닫게 된다.
살고 싶다는 건, 결국 사랑받고 싶다는 말이었다는 걸.

그러니 오늘도 나는,
살고 싶다고 말하는 법을 연습한다.
죽음을 부르던 입술로 이제는 삶을 부른다.
“살고 싶어.”
그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말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그 말을 마음속으로라도 따라 한다면,
그건 이미,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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