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잠들지 못한 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by Helia

약을 먹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던 때가 있었다.
“오늘도 잠이 안 오면 어쩌지.”
그 생각 하나로 새벽이 밝곤 했다.

약봉지에는 ‘하루 한 알’이라 적혀 있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한 알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가끔 두 알을 삼켰다.
그럼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더 또렷해졌다.
잠을 재우려던 약이 오히려 나를 더 깨웠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약의 효과가 사라졌다.
내성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이젠 무엇을 삼켜도 잠은 멀리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예 약을 끊었다.
불면의 밤이 다시 시작됐다.

밤은 끝이 없었다.
초침이 돌고, 냉장고가 숨을 쉬고,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끊겼다.
그게 새벽의 음악이었다.

모두 잠든 세상에서 나 혼자 깨어 있었다.
그 외로움 속엔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이 시간엔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세상이 잠든 사이, 나는 조용히 살아 있었다.

불면은 고통이기도 하지만,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깨어 있었다.
그게 나를 버티게 했다.

눈을 감아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어제의 말, 지나간 얼굴, 오래된 상처,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생각은 제멋대로 방향을 틀고,
감정은 시계처럼 같은 자리를 돌았다.

그럴 때면 억지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꺼풀 뒤가 더 시끄러웠다.
잠을 포기하고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차갑게 들어왔다.

바람이 얼굴에 닿자,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세상이 고요할수록, 나도 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식은 흙냄새, 축축한 바람,
낮에는 느낄 수 없는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 안엔 도시의 숨과 사람의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공기 속에서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모든 게 잠든 시간, 나는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잠이 아닌 깨어 있음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새벽 두 시, 세 시, 네 시.
휴대폰 시계를 켜고 끄며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새벽 네 시가 넘어가면 생각이 조금 정리됐다.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한 그 시간에만
나는 진짜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때 떠오르는 문장들이 있다.
낮에는 절대 하지 못할 생각들.
밤의 고요는 잔인할 만큼 솔직하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이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그립다.

불면은 나를 괴롭혔지만, 동시에 다듬었다.
잠들지 못한 시간들이 나를 버티게 했고,
내 마음을 낱낱이 들여다보게 했다.

그 긴 밤 동안 나는 많은 걸 놓아 보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
이루지 못한 일,
그리고 어쩔 수 없는 내 모습까지.

불면의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배웠다.
그냥 버티는 것도, 살아가는 일의 한 부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들 수 없다면, 그냥 깨어 있자.’

그때부터 나는 불면을 적으로 보지 않았다.
싸워야 할 것이 아니라,
그냥 함께 살아야 하는 리듬이라 여겼다.

어차피 인생의 절반은 깨어 있고,
절반은 잠드는 시간이라면
나는 그 깨어 있는 절반을 조금 더 오래 사는 셈이었다.

그래서 잠을 억지로 청하지 않았다.
피곤하면 잠이 오고, 아니면 그냥 깨어 있었다.
그 단순한 사실이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나는 더 이상 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불면은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이젠 나를 해치지 않는다.
그건 단지 내 삶의 다른 형태일 뿐이었다.

불면의 밤은 이상하게 정직하다.
그 시간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사람은 자신에게만 진실해진다.

그래서 나는 새벽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
모든 불안이 떠오르고,
모든 생각이 뒤섞이는 그 시간에만
나는 정말 살아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는 사랑 때문에,
누군가는 생계 때문에,
누군가는 아무 이유 없이 깨어 있을 것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그 고요 속의 외로움은 닮아 있다.

불면은 사람을 평등하게 만든다.
그 시간에는 누구도 강하지 않다.
모두 같은 깊이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한다.

밤을 건너면 아침이 온다.
그 단순한 사실이 위로였다.
잠을 못 자도, 해는 매일 같은 시각에 떠오른다.
그건 언제나 놀랍고 다정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멈추지 않았다.
그걸 깨닫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씩 풀렸다.

이따금, 정말 피곤한 날엔
거짓말처럼 깊은 잠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땐 오히려 잠이 낯설다.
너무 오랜만이라, 내 꿈이 어색하다.

하지만 괜찮다.
잠은 늘 떠났다가도 언젠가 돌아온다.
그건 나를 떠난 적 없는 익숙한 그림자처럼
조용히 다시 찾아온다.

오늘 밤도 잠은 오지 않겠지만, 괜찮다.
깨어 있는 이 시간도, 나의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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