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by Helia

매화가 절정에 이른 날, 마을의 공기는 유난히 고요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매화꽃이 한 장씩 떨어져 길 위에 내려앉았고, 그 꽃잎들 사이에 오래된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정류장 의자에는 꽃분이 할미가 앉아 있었다. 정수리에는 은빛이 내려앉았고, 주름진 손등엔 맑은 햇살이 졸졸 흘렀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오래전에 누군가 써준 이름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낡은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이젠 거의 지워져 모양만 남아 있었지만, 할미는 매화가 피는 날마다 그 손수건을 꼭 쥐고 이 자리에 나왔다.

기억은 흐리고, 날짜도 잊고, 사람들의 얼굴도 헷갈리기 일쑤였지만, 이상하게도 이 날만큼은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매화 향이 진해지면 정류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할미는 그 사실만큼은 잊지 않았다.

멀리서 버스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가파른 언덕을 천천히 올라오는 오래된 노란색 버스. 할미의 손끝이 떨렸다. 버스 바퀴가 흙길을 밟을 때마다 작은 먼지가 일었고, 그 사이로 매화꽃이 바람에 실려 떠올랐다. 마침내 버스가 정류장 앞에 멈추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몇몇 사람들이 먼저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중년 여자가 내렸다.

짧은 단발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주름진 눈가에는 환한 웃음이 번졌다.

“엄마.”

그녀의 목소리는 이 마을 매화 향보다도 따뜻하게 퍼졌다.
고현숙, 61년생.
정갈한 손길로 할미를 향해 다가오며 다시 한번 부드럽게 불렀다.

“엄마, 나 왔어.”

할미는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선 여자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눈동자 안쪽에서 무언가가 기울고 흔들렸다.
현숙의 얼굴은 빛에 반쯤 잠겼고, 그 웃음은 이상하게도 오래전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그 겹침이 아주 작은 틈을 만들었다.

바람이 불어 매화 향이 스쳤다.
그 향기는 닫혀 있던 기억의 문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문 틈 사이로 오래 전의 봄밤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열 살이었다.
아직 손도 발도 작아서 신발끈 하나 묶는 데 한참이 걸리던 나이.
그 어린아이가 세상의 잔인함을 너무 일찍 배운 밤.

거실에 떨어진 유리 소리, 눌린 숨, 엄마의 미약한 신음.
식탁 밑에 숨어 있던 현숙의 작은 손은 계속 떨렸다.
그러다 문틈으로 보인 엄마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지는 순간,
아이는 두려움보다 앞선 다른 감정을 느꼈다.
살려야 한다.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그 작은 가슴을 세게 흔들었다.

현숙은 벽에 기대 있는 골프채를 발견했다.
철제 끝이 달린, 아빠가 가끔 휘둘러보며 “묵직하다”라고 말했던 클럽.
아이의 손으로 잡기엔 너무 컸고,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현숙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발끝이 바닥을 더듬어 거실로 나아갔다.
엄마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울음과 공포로 젖어 있었고, 눈은 반쯤 감긴 채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열 살 아이의 머리는 새하얗게 비워지고, 가슴만 뜨겁게 타올랐다.

“그만해…”
울음이 섞인 작은 목소리.
그러나 아무도 듣지 못했다.

골프채가 작고 떨리는 두 손 안에서 크게 흔들렸다.
현숙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삼켰다.
그리고 온 힘을 모아 내리쳤다.

짧은 충격음.
그 뒤를 이은 정적.
너무 고요해서 오히려 귀가 울릴 정도의 침묵.

아빠가 휘청이며 돌아봤을 때,
아이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뒤엉켜 있었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견딜 수 없이 단단해져 있었다.

“엄마… 건들지 마…”
그 말은 어린아이의 목소리였지만,
누군가를 온몸으로 지키는 사람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
현숙은 그것을 끌어당겨 떨리는 손가락으로 번호를 눌렀다.
1.
또 1.
그리고 9.

119에 겨우 연결되자 아이는 울음을 닦을 틈도 없이 말했다.
“… 엄마… 숨… 쉬어요… 피가… 살려주세요…”
말이 뒤틀려 제대로 전해지지도 않았지만,
아이의 절박함만큼은 전화기 너머까지 전해졌다.

전화를 내려놓기 전에,
현숙은 다시 숫자를 눌렀다.
1, 1, 2.

그리고 숨을 삼키며 말했다.

“아저씨… 제가… 제가 했어요…”
작은 목소리.
“엄마… 살리려고… 제가…”

현숙은 자수라는 단어도 몰랐다.
하지만 그 어린 마음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저 엄마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결심을 한 것뿐이었다.

그날 이후,
열 살 현숙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녀의 삶 곳곳에 남아 있었다.
오늘처럼,
매화가 다시 피는 날이면 더욱 또렷하게 살아났다.

현재로 돌아와,
현숙은 정류장 앞에서 할미의 손을 잡았다.
딸의 손이 닿자, 할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몇 초 동안,
그 눈 속에서 오래된 시간들이 겹치고 흩어졌다.

바람이 불었다.
매화꽃이 몇 장 흘러내렸다.
그 꽃잎 사이에서 할미는 아주 천천히,
마치 잊은 기억을 되찾듯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익숙한 눈매,
어릴 때부터 울면 붉어지던 코끝,
어둠 속에서도 엄마를 지키겠다고 떨리던 작은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할미의 마음을 적셨다.

현숙은 말했다.
“엄마. 나 왔어.”

매화가 흔들리고,
정류장 위로 오래된 봄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이 오래도록 묵힌 시간들을 마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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