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결국 문을 두드렸다
나는 처음으로 ‘살아남고 있다’는 감각을 배웠다.
하지만 그 감각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세상은 잠시 멈춰준 듯 보였지만, 결국 다시 나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두 번째 날 오후,
식탁 위의 밥풀이 다 굳기도 전에
이모의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전화선이 뽑혀 침묵만 남아 있던 집 안에서
유일하게 세상과 이어진 작은 기계였다.
진동 소리가 거실 바닥을 파고들 듯 울리자
이모의 눈빛이 순간 굳었다.
그 표정 하나로
무슨 일인지 알아버렸다.
“응… 네. 곧 갈게요.”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등이 떨렸다.
“현숙아.”
이모가 내 이름을 불렀다.
짧고 조용한데,
그 안에 나를 붙잡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
그 말 뒤의 침묵은 너무 넓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속 무언가가 천천히 가라앉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제 본 그 얼굴.
반응 없는 눈.
움직이지 않는 가슴.
그리고 병원 형광등 아래에서
내 손에 남아 있던 골프채의 무게감.
택시 창밖의 세상은 늘 그랬듯 멀쩡했다.
사람들은 밥을 먹고, 길을 건너고, 배달을 하고, 웃고 떠들었다.
그 평범함이 그날따라 잔인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평범한 세상을 건너
아빠가 누워 있는 공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병원 복도는 어제보다 더 차가웠다.
아마 내 마음이 식은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더 냉정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모는 내 손을 잡고
문을 열기 전 잠시 멈췄다.
말 대신
그녀의 손바닥 온도가 나를 감쌌다.
문 안에는
어제와 똑같이 누워 있는 아빠가 있었다.
하지만 기계음은 어제보다 더 낮고 더 불규칙했다.
의사가 이모에게 다가와 고개를 조심스럽게 숙였다.
그 고개 숙임 하나가 인간의 끝을 말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도 뜨겁지 않았다.
마치 마음이라는 공간이
한순간 텅 비워진 것처럼.
“조금… 남았습니다.”
의사의 말은
누군가의 생이 문을 닫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겁도, 미움도, 연민도, 슬픔도
그 순간엔 모두 사치처럼 느껴졌다.
감정이라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곳 같았다.
병원을 나왔을 때
하늘은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따뜻한 빛이었는데
그 따뜻함조차 마음에 닿지 않았다.
이모가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현숙아.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우리… 이제부터 잘 살아보자.”
그 말은
진짜 어른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문장이었다.
저녁 무렵, 장례 절차 때문에
몇몇 친척들이 이모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불쌍하다,
안 됐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리고—
그래도 애가…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눈빛이었다.
어른들의 시선은 울지도 않았고, 위로하지도 않았다.
그저 상황을 계산하는 눈이었다.
이모는 그 시선 앞에 서서
하나하나 막아냈다.
“오늘은 아이 못 만나요.”
“얘는 지금 편히 쉬어야 해요.”
“나중에 다시 연락 주세요.”
그녀는 예의를 지키면서도
단단한 벽이 되어 섰다.
문을 닫는 이모의 뒷모습은
삶을 잃은 여자의 등이 아니라,
아이 하나를 지키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벽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
엄마가 치매로 나를 잊어갈 때마다
그날의 이모가 떠오른다.
세상의 폭풍은 바람이 아니라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그 폭풍 앞에서 처음으로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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