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서 오지만, 결국 나로 완성되는 것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서 치유받으라고들 한다.
누군가는 그 문장을 진리처럼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늘 마음 한구석에서 걸렸다.
사람이 나를 다치게 했는데, 왜 다시 사람에게 기대야만 한다는 걸까.
그 말은 때때로 또 다른 상처처럼 느껴졌다.
상처를 준 쪽과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에게조차 내가 다시 마음을 내어줘야 한다는 뜻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마음에 그런 말은 잔인했다.
상처는 대개 멀리 있는 이에게서 오지 않는다.
나를 믿게 만들던 사람, 기대했던 사람, 마음을 내어줬던 사람.
그들에게서 쏟아지는 말 한마디가 가장 뜨겁게 날아와 마음을 베어놓는다.
예고도 없이 떨어지는 비수처럼, 무심한 표정 하나가 온몸을 흔든다.
그러니 사람에게 상처받은 뒤 다시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는 건,
부서진 유리조각 위를 맨발로 걸어가야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다칠 수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한 걸음 내디뎌야 한다는 말 같다.
나는 그 말이 무겁고 두려웠다.
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던 날들 때문일까.
누군가 손을 내밀어도 쉽사리 붙잡지 못했다.
잡는 순간 내가 다시 쏟아져 버릴까 봐,
조금만 스쳐도 금이 더 깊어질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치유받아야 한다는 말은
나에게 ‘다시 위험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처럼 들렸다.
상처 난 마음은 그 문장 하나에도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어느 날, 묘하게도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치유라는 건 특정한 대상을 지명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사람에게서 치유받는다’는 말은
상처를 준 사람을 다시 믿으라는 강요가 아니다.
나를 무너뜨린 방식과는 전혀 다른 온도를 가진 누군가가
내 삶에 들어와 조용히 말해주는 것이다.
“너는 잘못이 없었다고.”
“그렇게 아파했던 마음, 너무 오래 혼자 두었다고.”
그런 말들이 때로는 상처의 방향을 바꿔놓는다.
상처가 내가 잘못해서 생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치유의 작은 불씨가 되어준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사람에게서 받는 치유는 준비된 마음에서만 가능하다.
닫힌 마음에 다가오는 온기는 때때로 부담이 된다.
다정함조차 상처인 시기가 있다.
어떤 위로도 마음의 벽을 넘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때가 있다.
그 시기의 나는 누군가의 선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날이면 외로움조차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울컥하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살아야만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를 돌이켜보면, 치유는 오히려 혼자 있는 순간에서 시작됐다.
새벽 새카만 방 안에서 오래오래 눈물을 흘리던 날,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바람 소리만 들리던 저녁,
누가 봐주지도 않는 자리에서 나 자신과 마주했던 그 시간들.
그 고요 속에서 꺼내놓은 감정이 치유의 첫 발걸음이었다.
‘왜 나만 이렇게 아픈가’ 하는 절망이 아니라,
‘이 아픔을 이제라도 들여다봐야겠다’는 인정에서 시작된 것.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먼지가 털려 나갔다.
그러니 사람에게서만 치유받아야 한다는 말은 온전한 진실이 아니다.
치유는 사람에게서 오기도 하고,
침묵에서 오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작은 격려에서 오기도 한다.
때로는 바람 한 줄기, 해 질 무렵의 빛,
오랫동안 듣지 않던 옛 노래가 마음을 일으킨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순간이 문득 나를 되살려 놓기도 한다.
치유는 그런 식으로 찾아온다.
예고 없이, 과장 없이, 조용히.
그렇다고 사람의 온기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는 분명히 특별하다.
말 한마디로 마음의 결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만 힘들어도 돼.”
그 짧은 문장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는지,
나는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아무 말 없이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주는 안정감 또한
시간을 건너 마음 깊은 곳까지 내려앉는다.
그 온기는 혼자라는 감각을 무너뜨린다.
흩어져 있던 내 마음의 조각들을 조용히 모아준다.
하지만 이 모든 치유는 하나의 사실을 전제로 한다.
먼저 ‘나 자신과의 화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
나를 미워한 채 사람의 손을 잡으면,
그 손길조차 상처로 느껴진다.
나를 탓한 채 위로를 받으면,
그 위로는 마음에 닿지 않고 흩어져 버린다.
상처를 끌어안고
“정말 힘들었지?”
이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는 일.
그게 치유의 시작이었다.
마음을 서서히 들여다보는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내가 나에게 가장 먼저 해줘야 했던 말들이
조용히 자리 잡았다.
그제야 사람의 손길도 온전히 닿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다정함이 불편함이 아니라 온기로 느껴졌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사람에게서 치유받는 건 준비된 마음만이 누릴 수 있는 기적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서도 치유될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도, 그 후에도,
가장 오래 나를 지켜온 건 결국 나였다.
사람의 온기는 치유의 마지막 단계일 뿐,
첫 번째 단계는 언제나 나와의 화해다.
그 진실을 깨닫는 순간,
상처의 그림자는 깊이를 잃고 조금씩 사라진다.
누군가의 손을 잡는 용기는
이미 나 자신이 나를 치유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니 치유는 사람에게만 맡겨두어선 안 된다.
사람으로 인해 무너질 수 있지만,
사람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정말로 누군가가 다가와
살며시 손을 내밀어준다면—
나는 이제 그 손을 잡을 수 있다.
이미 그전까지,
나 자신이 나를 충분히 안아왔으니까.
이렇게 치유는 완성된다.
누군가의 온기와,
그보다 더 오래 나를 지탱한 나의 마음이
함께 만든 결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