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시간이 나를 다시 살린 밤들
하루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현관등도 켜기 전의 그 짧은 어둠 속에서 나는 종종 멈춰 선다.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는데 마음만 남아버린 밤.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어디에도 나를 재촉하는 손길이 없는 시간. 가만히 서 있는데도 어쩐지 마음이 부유하는 것 같은 그 순간. 남는 시간이란 어쩌면 이런 얼굴을 하고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빈 방보다 텅 빈 건 마음이고, 고요보다 더 크게 울리는 건 나 자신이다.
나는 늘 남는 시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루 중 파편처럼 떨어져 나온 자투리. 아무 의미 없는 빈칸.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남는 시간이야말로 나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자리라는 걸. 사람들은 바쁠 때는 쉽게 자신을 속인다. 해야 할 일을 핑계로 감정을 미루고, 일정을 앞세워 마음을 숨긴다. 그러나 남는 시간에는 그 어떤 가면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고요는 사람을 정직하게 만든다. 숨겨둔 감정들이 천천히 떠올라 나를 마주하게 한다.
불 꺼진 방에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던 밤이 있었다. 그날은 하루가 유난히 길었고, 내 안에서 무언가가 바스러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샤워도 귀찮아 그대로 소파에 몸을 던졌는데, 천장에서 내려오는 어둠이 내 마음과 닮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이상하게 허전해졌다. 하지만 그 허전함은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 안에는 ‘아직 살아 있다’는 조용한 증거가 담겨 있었으니까. 그렇게 남는 시간은 마음이 쉬어가는 잠깐의 땅이 되어주곤 했다.
남는 시간은 늘 같은 표정만 하고 오지 않는다. 어떤 날은 나를 쉬게 하고, 어떤 날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어떤 날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할 만큼 눌러앉기도 한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는 순간에 갑자기 몰려드는 공허함과 불안. 이유도 모른 채 멍하니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가 시간을 통째로 버린 것 같은 기분. 그럴 때면 나는 남는 시간이 내게 시험을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알겠다. 사실 남는 시간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 시간에 마주하는 ‘나’가 무서웠던 거라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마음이 쉴 틈이 없다. 그러나 남는 시간 속에 서면 마음은 숨을 고르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내가 오늘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무엇을 애써 외면했는지, 누구 때문에 울컥했는지, 무엇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었는지를. 남는 시간이란 마음이 돌아올 항구였다. 파도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는 부두처럼, 고요를 견디며 마음이 머무르는 곳.
어떤 날은 남는 시간이 너무 많아 억울할 정도였다. 뭘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해야 할 일조차 없는 오후, 마음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저녁. 그럴 때일수록 나는 나 자신을 다그쳤다. “뭐라도 해야지.” “이렇게 멍하니 있는 게 맞나?” 괜히 불안해서 책을 펼쳤다가도 몇 줄 읽지 못하고 덮었고, 드라마를 틀었다가 금방 지루해져 버렸다. 남는 시간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이 무겁고 긴장된 채로 남아 있는 때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런 시간도 필요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살아가다 보면 남는 시간이 생기지 않는 날들이 있다. 숨 돌릴 틈 없이 내달리는 하루들. 그럴 때 사람들은 오히려 남는 시간을 갈망한다. 단 10분이라도 좋으니 가만히 있고 싶고, 아무도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고,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내려놓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깨닫는다.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남는 시간이 실은 내 삶을 지탱하는 숨구멍이었다는 걸. 남는 시간이 없으면 삶은 금세 질식한다. 빽빽한 일정은 효율을 줄지는 몰라도 마음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남는 시간을 남겨두는 것도 용기라는 걸.
내가 가장 변했던 순간은 남는 시간 속에서였다.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복잡해 하루를 통째로 쉬어버린 적이 있다. 그날 나는 계획을 모두 내려놓았다. 휴대폰도 비행기 모드로 두고, 소파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별 생각도 없었고, 마음은 잔잔했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 마치 오래된 서랍을 열어 먼지를 털고, 다시 필요한 것만 천천히 담아가는 기분. 나는 그날 비로소 깨달았다. 남는 시간은 나를 완전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걸.
남는 시간을 잘 쓰는 법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억지로 의미를 만들려 하면 오히려 마음이 부서진다.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건 화려한 계획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올라오는 작은 목소리다. “괜찮아.” “좀 쉬어도 돼.” “오늘은 너를 돌봐도 돼.” 남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순간, 마음은 다시 숨을 쉰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배웠다. 하지만 늦게 배운 만큼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남는 시간은 우리를 가르친다. 느린 속도에도 삶이 흘러간다는 걸. 가만히 멈춰 서 있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잠시 내려놓아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걸. 남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나를 어루만진다.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마음의 일들을 하나씩 정리한다. 불필요한 미련을 털어내고, 가볍게 만들고, 다시 나를 일으킨다.
그리고 깨닫는다. 남는 시간이란 결국 나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시간이라는 걸. 바쁘게 움직일 때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남는 시간 속에서야 비로소 숨을 들이마시고, 들썩이며, 천천히 회복한다. 남는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훨씬 쉽게 무너졌을 것이다. 잠시라도 여백이 있었기에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여백은 사치가 아니라 필요였다.
오늘도 하루의 끝에서 남는 시간이 찾아오면 나는 더 이상 도망치듯 스마트폰을 켜지 않는다. 가만히 숨을 고르고, 스탠드를 켜기 전의 어둠 속에서 마음이 가라앉는 소리를 듣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무 성취가 없어도 괜찮다. 남는 시간은 쉬어가는 게 아니라, 내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시간. 그 사실 하나만으로 오늘의 고단함이 조금은 덜어진다.
남는 시간은 나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그 고요는 나를 파괴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되살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남는 시간을 사랑하기로 한다. 그 잠깐의 여백이 내 마음을 살리고,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니까. 남는 시간 속에서 나는 하루의 끝을 견디고, 내일을 준비하며, 아주 천천히 다시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