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남긴 발소리
“누구든… 이번엔 반드시 만나야 해.”
나는 문 앞에서 조용히 그렇게 말하며 숨을 골랐다. 토끼는 내 뒤에서 고개만 살짝 내밀고 있었다. 귀 끝의 작은 리본은 공기 한 줄에도 떨렸고, 은빛 털은 바람이 스친 것처럼 희미하게 흔들렸다. 실내등은 따뜻하게 켜져 있었지만, 문밖의 어둠은 이상하리만큼 차갑고 깊었다. 마치 어둠이 아니라 ‘누군가의 빈 마음’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나는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차갑고 미세한 떨림이 손바닥 너머로 스며들어왔다. 토끼가 내 옷자락을 꼭 붙들며 말했다.
“미… 미미 선생님… 혹시… 또 그 아이가…?”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문을 아주 천천히 열었다.
문이 열리는 동안, 어둠이 실내로 스며들까 봐 숨도 쉬지 못했다.
하지만 문 너머는—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조차 이상했다.
빛이 반사되지 않고, 소리가 머물지 않고, 바람조차 드나들지 않는 공간.
어둠은 평범한 어둠이 아니라, 누군가의 감정이 사라진 자리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내 발아래에서 무언가가 스쳤다.
흙바닥.
그리고 그 위에 찍힌 발자국.
나는 숨을 멈추고 발자국을 내려다봤다.
작고 가늘고, 토끼 발자국과 비슷하지만 미세하게 달랐다.
토끼보다 조금 더 둥글고, 간격도 아주 조금 더 좁았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점—
발자국의 테두리가 ‘빛’이 아니라 그림자로 번져 있었다.
마치 어둠이 땅 위에 눌린 채 남은 것처럼.
“저거… 저거예요…”
토끼가 내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아이가 남기는 발자국… 맞아요…”
나는 살며시 무릎을 꿇고 손가락을 발자국 가까이 가져갔다.
그 순간 미세한 바람 한 줄이 숲 속에서 스르륵 흘러왔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지만, 바람은 나를 스치며 분명히 말을 전했다.
“… 돌아와…”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둘러봤다.
방 안에서 쿠쿠와 루루가 동시에 숨을 삼켰다.
토끼는 내 꼬리를 꽉 붙잡았다.
리본이 떨리다가, 바람이 스치자 한쪽이 살짝 풀렸다.
나는 얼른 손으로 묶어주며 속삭였다.
“괜찮아. 나쁜 건 아니야. 아직은.”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다른 감정이 꿈틀거렸다.
불길함.
그리고 아주 작은… 익숙함.
마치 오래전 잊었던 무언가가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듯한 감정.
나는 발자국을 다시 살펴보았다.
발자국은 서서히 숲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보이지 않던 발자국들이 하나씩 하나씩—마치 누군가가 지금 막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흙 위에 나타났다.
“미미 선생님…”
토끼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왜… 왜 발자국이… 지금 생겨요…?”
나는 입술을 삼키며 말했다.
“말랑숲에는 규칙이 있어. 마음이 깊게 찢어지면… 조각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해.”
토끼는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음 조각은 주인을 기억해. 그래서 때때로… 주인 대신 걸어가기도 해.”
토끼의 두 귀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럼… 이 발자국은… 제 마음이에요…?”
나는 장난처럼 웃어주려 했지만,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발자국의 크기가 토끼와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마음 조각이 걸어 다닌 것처럼.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발자국 끝에는 아주 작은 귀 모양 실루엣이 어둠 사이로 스쳤다.
너무 짧아서 놓칠 수도 있는 흔적.
하지만 나는 봤다.
작은 귀 두 개.
그리고 그 뒤에서 번지던 은빛의 한 줄기.
“저거…”
토끼가 숨을 멈추며 속삭였다.
“저거… 제가 잃어버린… 마음일까요…?”
그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숲 속에서 또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돌아와. 이번엔… 나를 봐줘…”
나는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 목소리는 분명 토끼를 부르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다른 감정도 섞여 있었다.
슬픔, 외로움, 그리고… 내게도 익숙한 그리움.
나는 토끼를 꼭 안았다. 조그마한 몸이 내 품 안에서 떨리고 있었고, 리본도 다시 흔들렸다.
“토끼야. 네 마음이 널 부르고 있어. 하지만… 그 마음은 이제 혼자가 아니야. 내가 같이 갈게.”
나는 천천히 발자국 위에 발을 올렸다.
달빛이 발자국을 은빛으로 물들이며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숲의 어둠을 바라보며 마지막 한마디를 속삭였다.
“네 마음은… 지금 나를 부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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