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67장|사랑은 때때로 너무 늦게 도착하는 편지 같다

말하지 않은 사랑이 가장 늦게 도착한다

by Helia

사랑은 언제나 제때 오지 않았다.
적어도 내 삶에서는 그랬다.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두드리고 있었지만, 내가 그 두드림을 알아차린 순간에는 늘 상대가 돌아서는 뒷모습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수없이 생각했다.
“왜 사랑은 이렇게 늦은 걸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늦는 게 사랑이 아니라, 늘 늦는 건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끔은 너무 빨리 마음이 자라 버려 상대가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채 굴러가던 사랑이 있었고, 또 어떤 사랑은 아주 느린 속도로 싹이 트는 바람에 상대가 떠난 뒤에야 ‘이게 사랑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았다.
사랑의 속도는 언제나 사람의 속도와 다르다.
이 어긋남이 큰 상처가 되기도 하고, 평생 잊히지 않는 후회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한때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말수가 적고, 눈웃음이 부드러웠다. 어느 겨울날, 퇴근길에 갑자기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우산이 없었고, 그 사람은 우산을 가지고 있었다. 우산 하나를 나누어 쓰며 걷던 순간, 나는 내 심장이 그 방향으로 조금 기울어졌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제대로 이름 붙이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을 때, 그 사람은 이미 멀리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알았다.
“말해진 사랑보다, 말하지 못한 사랑이 더 오래 남는다.”

사람은 때때로 너무 늦게 사랑을 깨닫는다.
어떤 마음은 그때는 보이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고 문득 떠오르는 순간에야 빛을 발한다. 마치 발송되지 못한 편지가 우체통 아래에서 오랜 시간 잠들었다가 어느 날 우연히 발견되는 것처럼.
펼쳐볼 용기도 없었던 마음들이 나중에서야 내 손 위로 돌아온다.
그 편지에는 ‘지금은 아무 의미 없는 마음’만 남아 있다.
그 마음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너무 늦어져버린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그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이 질문은 사람을 가장 아프게 찌른다.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 이런 후회를 품고 산다.

나는 또한 이런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와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날이었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서로 할 말을 정리하듯 긴 침묵만 지나가던 순간.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수십 번 외쳤다.
“가지 마.”
하지만 입술은 단 한 번도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끝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테이블 위에는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커피만 남았으며, 그의 뒷모습과 함께 내 사랑도 그때 멀어져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나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의 마지막을 더 확실하게 만든 이유였다는 것을.
침묵은 사랑을 지키지 못한다.
침묵은 오히려 사랑을 흘려보낸다.

사람이 늦는 이유는 단순하다.
두려움 때문이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거절할까 봐, 혹은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질까 봐.
그래서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말해야 할 순간에 침묵하고, 고백해야 할 순간에 뒤돌고, 잡아야 할 순간에 손을 놓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후회한다.
모든 건 너무 늦어버린 후에야 깨닫는다.

“사랑은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가장 늦게 도착한다.”

그래도 이상한 건, 늦게 도착한 사랑도 때로는 틀린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늦게 도착한 사랑은 더 깊고, 더 오래되고, 더 따뜻하게 남는다.
미성숙한 때에 했던 사랑은 쉽게 흔들리고 쉽게 붕괴되지만,
늦게 깨달은 사랑은 나를 오랫동안 지키는 힘을 남긴다.
그게 지나간 사랑이라도, 끝난 마음이라도, 상관없다.
우리의 내면은 때때로 ‘늦게 도착한 마음’에게서 가장 정확한 진실을 배운다.

나는 어느 순간 이런 문장 하나를 마음속에서 되뇌기 시작했다.
“늦게 알았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었던 건 아니다.”
이 문장을 떠올리면, 조금은 마음이 덜 아팠다.

사랑을 너무 늦게 깨닫는 건 죄가 아니다.
하지만 사랑을 말하지 않고 묻어두는 건 평생을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된다.
사람 마음은 나이 든 후에 훨씬 분명해지는 법이다.
삶의 계절을 여러 번 지나오고 나면, 우리는 안다.
더 일찍 말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말할 수 없었다는 걸.
그때의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사랑한 것이었다는 걸.

우리는 왜 늘 사랑을 늦게 깨닫는 걸까?
그것도 역시 사랑이 주는 선물 같다.
사랑은 빠르게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해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때때로 너무 늦게 도착하는 편지 같다.
길 위에서, 시간 속에서, 내 마음의 뒤편에서 헤매다가 겨우 내 손에 돌아오는 편지.
늦었지만 꼭 도착하는 마음.
그런 편지야말로 사람을 성장시키고, 성숙하게 하고, 더 깊은 온도를 알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 나는 깨달았다.
늦게 도착한 사랑이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다는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사랑일수록, 기억은 더 조용히 빛을 낸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일수록, 마음속에 더 따뜻이 자리 잡는다.

사랑은 항상 빛처럼 빠르게 도착하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랑은 그림자처럼 천천히, 조용히, 아주 늦게 도착한다.
그 늦음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내가 살아낸 시간의 결과이자, 내가 배운 사랑의 방식이니까.

그러나 이런 말은 꼭 하고 싶다.
“늦게 깨달은 사랑은 아름답지만, 제때 말하는 용기는 더 아름답다.”
사랑은 말해야 사랑이 되고,
표현해야 닿을 수 있고,
내밀어야 손이 맞닿는다.
늦어서 아픈 마음도 소중하지만,
제때 건네진 사랑은 두 사람을 살리는 힘을 가진다.

그래서 나는 이제 조금은 다르게 살고 싶다.
마음이 떨릴 때는 침묵 대신 고백을 하고,
그리울 때는 품고만 있지 말고 표현하고 싶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순간, 이유 없이 단 한 사람만 떠오른다면,
그건 이미 늦지 않은 마음이니까.
늦었어도 좋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말하는 것이,
내가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방식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보내지 못한 마음을 품고 살 것이다.
어쩌면 그 마음은 언젠가 편지가 되어 도착할지도 모른다.
혹은 영영 보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렇게 믿는다.
늦게 도착한 사랑도 사랑이고,
늦게 깨달은 마음도 마음이며,
늦게 말한 감정도 진짜다.

사랑은 때때로 너무 늦게 도착하는 편지 같다.
그래도 괜찮다.
도착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귀한 것이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네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그 사람.
그 마음, 아직 늦지 않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