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아이를 만나고 달라진 우리만의 여행 공식
발리는 늘 가보고 싶었던 곳이지만, 아이와 함께 떠나기에는 망설여지는 장소였다.
만 네 살 아이와 여덟 시간 비행도 처음이거니와, 엄청시리 고생한다던 ‘발리 밸리’도 걱정되고, 매연이 심하다, 길이 험하다는 평이 많아서 두려웠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원숭이에게 공격당했다는 후기는 왜 자꾸 눈에 띄는지.
만일 남편이 결혼 전에 발리를 다녀와 보지 않았다면, 이번 여행을 결심할 수 없었을 것 같다. 홀로 떠난 발리 여행이 좋았던 남편은 나와 아이도 발리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 했다. 마침, 올해 회사에서 장기근속 휴가를 받은 남편은 모처럼 길게 쉴 수 있는 지금이 바로 발리에 가야 할 때라고 설득했다.
그래, 가보지 뭐!
남편이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고생이 참 많았다. 총대를 멘 죄(?), 여행 계획을 못 짜는 아내를 둔 죄로.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계획 짜기에는 영 젬병이다. 사람들은 어쩜 가보지도 않은 곳을 여행할 계획을 그렇게 알차게 잘 짜는지 신기할 뿐이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해내 는 실행력과 체력 또한 어찌나 부러운지.
내가 방문하는 날 날씨가 좋을지 나쁠지, 컨디션이 어떨 지도 알 수 없는데 ‘Day 1, Day 2’ 이런 식으로 계획을 짤 수는 없었다. 어쩌면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이 싫다는 핑계로 무계획을 정당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전에 여행 정보를 꼼꼼히 모으는 성격도 못 되는 나는 주로 그곳을 여행하거나 살아본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으면 ‘사전 여행’을 떠난다. 글쓴이의 경험을 통해 여행지에 대한 나만의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 환상에 부합하는 장소, 액티비티를 알아보며 느슨한 위시리스트를 만드는 식이다. 핀만 들쑥날쑥 잔뜩 꽂혀 있는 지도만 갖고서는 한정된 일 정 안에서 보고픈 것, 먹고픈 것을 다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숙명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언제고 다시 또 오면 되는걸.
다행히 남편도 나와 여행 스타일이 크게 다르지는 않은 편이라 지금껏 서로 맞춰가며 재미나게 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여행 준비의 차원이 완전 달라진 것이다.
마음이 동하는 ‘감성 숙소’를 골랐다가 빛 좋은 개살구처럼 불편한 점이 있어도 좀 참고 버티면 됐던 이전과는 달리, 이제는 바닥이 마루인지 카펫인지, 취사를 할 수 있는지, 세탁기는 있는지 등을 체크해서 숙소를 잡아야 했다.
짐 싸기는 또 어떠한가. 예전엔 여행 전날 밤새 짐을 챙겨 어떻게든 캐리어에 욱여넣고 지퍼가 잠기게만 하면 되었는데,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기저귀, 분유, 이유식에 수건, 꼬까옷부터 내복, 이불*까지 깔끔하게 꼼꼼하게 챙기려 니 벼락치기가 너무 힘들었다. 혹시 몰라 ‘돌돌이’까지 챙 겨 다니니, 내가 좀 유난인가 싶기도 하고. (*이유식 끝나고, 기저귀 떼니 훨씬 나아졌다.)
게다가 이번 여행은 총 며칠 일정으로 갈지 결정하는 것부터가 내적 갈등의 연속이었다. 여행에 있어서는 늘 ‘가능한 한 길게!’를 지향해 온 우리 부부였지만, 아이와 함께 떠날 생각을 하니 나는 겁을 먹고 말았다. 중간에 아이가 크게 아프거나, 발리를 싫어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당장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문제가 생겨서 집에 가고 싶어 하면 어쩌지? 어쩌긴, 그냥 돌아오면 되는데.
따지고 보면 지난해 비슷한 일정으로 오키나와에 갈 때는 그런 걱정이 없었는데, 이번엔 왜 그렇게 두려웠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발리 여행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 아이와 함께라고 하니 곱절이 되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남편이 손품을 팔아 최적의 출발-도착 시 간과 가성비를 모두 만족시키는 항공편을 따져본 뒤에 총 9박 11일 일정으로 결정했다.
다양한 매력을 가진 도시 중 어디를 갈지를 정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들었다. 그렇다 보니 숙소를 미리 잡을 수도, 세부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배낭여행처럼 숙소도 정하지 않고 이동할 수는 없는 일. 그리하여 마음 급한 남편은 수많은 유튜브 영상을 참고하여 호 텔 정보를 리스트업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내가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자(‘어디가 어딘지 어떤지 몰라서 못 고르겠어...’), 유명한 호텔들은 무료 취소 가능 조건으로 여러 개 예약해 두기까지 했다.
드디어 방문할 도시가 세 개로 좁혀지자, 남편은 추려둔 숙소들의 링크를 보내주며 골라보라 했다. 그렇게 후보 중에서 장단점을 알아보고, 후기를 살펴본 뒤 세 곳의 숙소 예약을 마치고 나니, 마치 이미 발리에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몇 달에 걸쳐 항공권을 끊고, 숙소까지 정했으니 일단 떠날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셋이 다 같이 보건소에 가서 장티푸스 예방접종도 하고, 단골 소아과에서 유산균도 추가로 처방받았다. 중간에 가루다항공은 왜 자꾸 일정을 자기네 멋대로 바꿔대는지. 여행의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불신과 불안 속에 너무 지쳐버린 우리였다.
잘 다녀올 수 있겠지?
이제 진짜 여행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