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무렵 회사 안팎은 시끄러웠다.
겉으론 조용했지만, 안에서는 권력 싸움과 자기 프로젝트 지키기에 모두가 혈안이었다.
신규법인 JBL안에 용 과장과 연 부장의 주도권 경쟁이 있었다.
용 과장은 단순한 디자이너가 아닌 JBL의 신사업 기획을 담당했다.
연 부장은 소프트웨어실 부서장이다.
그 둘은 다르지만 욕망이 가득했다.
내가 경험한 둘은 높이 오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JBL는 종전에 자동화기기 시장을 벗어나기 위한 신사업 기획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둘은 경쟁을 했었다.
사장님에게 신사업 기획안을 보고하며 서로 견제하며
서로를 헐뜯었다. 둘에 대한 좋지 않은 풍문이 돌았다.
특히, ‘크로스 프로젝트’
크로스 프로젝트는 연 부장의 자존심이었다.
GUI를 플래시 기반으로 만든 소프트웨어였다.
처음엔 그럴싸했다.
직관적인 애니메이션도 깔쌈했고, 폰트도 동글동글 귀여웠다.
은행 직원들은 “디자인도 훌륭하고 재밌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세상은 변했고,
플래시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기술이 되었다.
보안에 치명적이었고,
HTML5라는 새로운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은행들은 하나둘 플래시 화면을 퇴출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연 부장은 끝까지 버텼다.
“은행은 폐쇄망이라 문제없습니다.”
“보안 이슈는 과장됐어요.”
그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폐쇄망이면 뭐 해… 고객이 불안하다는데.”
회의 때마다 연 부장은 말했다.
“크로스는 완성도가 높아요. 이미 검증됐습니다.”
검증? 누구한테? 자기한테?
시간은 그렇게 흘렀고,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 채,
카오스는 점점 회사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한편, BLUE LAKE는 다른 노선을 탔다.
“우린 HTML5 갑니다.”
몇몇 개발자가 프로토타입을 뚝딱뚝딱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도 손 놓고 있었다.
“우리가 사용하던 원조 소스는 안정화됐으니 당분간은 유지보수만 하자”
“플래시가 언제까지 돌아간다고! 곧 다시 원조 소스로 돌아올 거야”
누군가는 바꿔야 한다고 말했지만,
누군가는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다”라며 미뤘다.
결국 아무도 안 움직였다.
그리고 회의.
“이제 플래시 지원 끊긴다는데요.”
“알아요. 근데 크로스는 보안상 문제없어요.”
“은행에서는 그렇게 안 봐요.”
“…그럼, 누가 설득 좀 해주세요.”
이게 설득할 일이냐? 고객이 이미 “싫다”는데.
문제는 단순한 기술 싸움이 아니었다.
BLUE LAKE사 vs. JBL사
서로 자기 프로젝트를 포기할 수 없었다.
크로스를 버리면 JBL사가 손해였다.
HTML5로 갈아타면 BLUE LAKE가 주도권을 잡게 됐다.
그래서 모두 멈췄다.
고객도, 사용자도, 디자인도 전부 뒤로 물러났다.
“디자인싱킹? 웃기지 마.“
여기선 ‘사용자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이었다.
‘내 연봉 중심’, ‘내 자리 중심’, ‘내 프로젝트 중심’.
누군가 회의실에서 말했다.
“그냥 외주 주는 게 낫겠네요.”
정답인데 왜 이렇게 서럽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메신저에 마지막으로 남겼다.
그런데 디자인은 요?
… 답은 없었다.
그게 그 시절이었다.
디자인은 명분이었고,
실제 전쟁은 ‘업적 보호 전’이었다.
그 후, 드디어 고요하던 회사에 바람이 불었다.
BLUE LAKE는 실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JBL의 실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말해야 했다.
“이제 사람 줄여야 합니다.”
이에 BLUE LAKE와 JBL사 합쳐 각 포지션에 전문가 1명씩 두기로 했다.
그 결과 12명 정도가 정리 대상이었다.
제품 디자이너는 두 명이었다. 나와 용 과장
BLUE LAKE의 매출은 유지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JBL사장은 단호했다.
“JBL 디자이너는 안 됩니다.”
못을 박았다.
그 순간, 난… 명단에 올랐다.
또 한 번에 위기였다.
이상하게 덜 놀랐다. 아니, 어쩌면 익숙했다.
이 회사에서 ‘쓸모’는 기술이 아니라 권력이었다.
나는 기술도, 권력도 아니었다.
‘디자인’만 믿었던 디자이너.
그래서, 나는 또 밀려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동안 잘 버텨 왔지만 이번에는 내 차례구나.”
“아직 젊은데… 이제 진짜 끝이겠지.”
하지만 묘하게 담담했다.
오히려 자유로웠다.
‘디자인’을 위해 싸우던 시절이 부끄럽지 않아서.
애사심도, 배신감도 다 버리고 나니까
남은 건 오직 디자인을 믿었던 내 자신 뿐이었다.
(다음 편 : 15화 쓸모 없는 사람의 조건)
글/그림 : 오쌤
※ 이 글은 일기를 바탕으로, 제가 겪은 실제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묘사된 상황에는 개인적인 시선과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음을 이해하며, 이 글이 상처가 아닌, 공감으로 닿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