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워녕 Nov 26. 2019

어쩌면 너희보다 내가 먼저였을 수도 있어서.

끝이 안 보이는 어둠 속에 있는 그대들에게.


 삶을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모든 일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새 직장을 구하는 일도, 새로운 취미를 갖는 일도 '이렇게 할까, 아니면 저렇게 할까'의 고민의 과정이 있지만, 아무튼 D-day를 정하고 진짜 시작하는 것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진다.

 꼭 그렇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 아니어도, 집안일을 하면서도 모든 일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여름이 지나 선풍기를 창고로 집어넣는 일도 내일로 미루지 않고 굳이 '오늘' 하려면 전격적으로 몸을 일으켜 소매를 걷어붙여야 한다. 겨울맞이 이불을 꺼내는 일도, 청소를 하는 일도, '조금 이따가'가 아니라 '지금' 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와 열정을 기반으로 전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고민하고 방법을 강구하는 건 몇 날 며칠이 걸릴 수도 있지만, 막상 일이 이루어지는 건 그 순간이다.

 조금 더 소소한 일들도 마찬가지. 점심에 수많은 메뉴 중에 김치찌개를 먹기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도 전격적으로 이루어지고, 하다못해 화분의 위치를 옮기는 것, 걸레질을 하는 것, 라면에 파를 썰어 넣는 것도 전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일들이 전격적으로 실행되는 순간을 세분화해보면, 먼저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본인이 고민하고 구상하여 가능한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이 있는 때와 장소를 '선택'해야 하고, 쉬고 싶어 하는 몸을 일으켜 힘을 낼 수 있도록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삶의 모든 일은 이렇게 전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우울과 공황의 세계에 나도 잠시 들어갔었다. 물론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우울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로 인해 일상생활이 힘들어지는 수준이 되면 문제가 된다. 지금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서 늘 조심하며 살피고 있다.


 그 세계에 있어보니,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일들을 도저히 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했다. 몸을 일으켜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도무지 그럴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열정'이라는 단어가 너무 낯설어졌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이것이었다. 사실 삶을 향한 모든 일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 어떤 것도 전격적으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것.


 청소를 하는 것, 이불을 개는 것, 강아지 목욕시키는 것도 나는 할 수가 없었다. 그때에야 알았다. 밥을 먹는 것도 전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것임을. 나는 밥도 먹을 수 없을 만큼 무기력했다. 전격적으로 무언가를 할 만큼 나에게는 욕망이 없었고, 어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선택할 의지도, 실행할 에너지도 없었다.


 그 상태로 직장을 다니고 일을 한다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외부 미팅이라도 있는 날이면 집에서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엉엉 울었다. 그렇게 가기 싫을 수가 없었다. 몸이 너무 무거웠다. 옷을 하나씩 집을 때마다 그 옷에 쇳덩이를 치덕치덕 붙여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이대로 쓰러졌으면 싶었다.


 최근 생을 스스로 마감한 젊은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접하며, 정말 너무 안타까워서 줄줄 울었다. 그 어두운 늪에 잠시 다녀온 나도 그렇게 힘들었었는데... 그들의 세상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카페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옆 테이블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몇몇은 쉽게 말한다. 자기는 자살하는 사람이 가장 싫다고. 그건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자기만 편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가족도 친구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무책임한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난 또 마음이 아팠다. 아마 그게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건 '살아가기 위한' 일일 때의 말이다. 누구도 우울하게 살기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들 표현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그들은 그것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은 그렇게 전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몇 번이고 할 수 있지만 실행에 옮기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고민하고 계획해서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는 게 아니다.


 내가 우울과 공황의 세계에서 정점을 찍었을 무렵, 어느 하루는 친구들과 남산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지만 오전에는 출근을 했다. 그 무렵은 안 그래도 두 팔과 두 다리에 5kg짜리 모래주머니를 달고 생활하는 것처럼 힘겹게 살아가던 때였는데, 그 날은 회사에서 서로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로 그냥 회의가 종료되는 등 회사 내에서도 심란한 날이었다. 나는 화를 낼 에너지도 없었고, 흘릴 눈물도 없어 멍하니 있었다. 심지어 오전 내내 주룩주룩 비가 왔다. 모래주머니가 10kg짜리로 늘어나는 느낌을 받으며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그냥 누가 나를 차로 좀 들이받아줬으면 싶었다.

 오전이 지나자 비가 그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가 났고,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연일 미세먼지로 온 세상이 탁했었는데, 비가 미세먼지를 다 쓸어내려 깨끗한 공기가 코로 들어왔다.

 

 저녁에 명동에서 친구들을 만나 남산을 걸어 올라갔다. 케이블카를 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뭔가를 '하고 싶다'라고 느낀 건 참 오랜만이었다. 나는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3월 중순의 공기는 꽤 차가워서 두 볼과 코끝이 빨개졌지만, 상관없었다.

 무겁디 무거운 팔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몇 계단 오르지 못하고 쉬고, 또 쉬기를 반복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남산 꼭대기는 점점 가까워졌고, 중간중간 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숨을 멎게 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건물들과 사람들, 자동차들은 점점 작아졌지만, 공기가 얼마나 깨끗했던지 그 모든 것이 다 선명히 보였다. 수많은 창문과, 자동차의 빨간 불빛과 길, 나뭇가지까지 모두 선명히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간판의 글씨도 또렷이 보일 정도였다. 추워서 손 끝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팔을 들어 주머니에 넣을 힘이 없어 그저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보았다.

 

그날, 그 광경 

 

 정상에 올라가서도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내 모든 시야가 그 광경으로 둘러싸였다. 캄캄하지만 반짝이는, 차갑지만 또렷한 그 광경이 나를 사로잡았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광경이라면 나를 받아줄 것 같다.'

 '내 모든 것을 다 내던져 안기고 싶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을 힘도 없는 내가 점점 난간 가까이로 다가갔다. 차가운 난간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나를 둘러싼 그 광경 속으로 내 몸이 조금씩 기울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웠다. 나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고, 그 어떤 선택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굳센 의지도 없었다. 숨을 쉬는 게 당연하듯, 발꿈치를 들었고, 몸이 난간 밖으로 점점 더 기울었다.


 그때 친구가 한참 뒤에서 나를 불렀다.

 "추운데 뭐해. 안에 들어가서 따뜻한 거 마시자."


 순간 꿈에서 깬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난간을 붙잡고 까치발을 해가며 정말 바깥으로 몸을 내던지려 하고 있었다. 그제야 내 손이 보였다. 안 그래도 얼어붙었던 손이 차가운 난간을 만나 감각이 없어지고 있었다.

 

 그날 그 시간 이후 그때의 내 행동에 대해 몇 번이고 곱씹어보았지만, 타당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삶을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버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방법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하면 편해지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찾으라면 '그냥'이었다. 그 시간, 그 상황의 나로서는 그렇게 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르는 일이었다. 그냥.

 

 이제는 고인(人)이 된 그 젊은 연예인들도 아마 그랬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도 생을 포기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살아보자. 괜찮다. 열심히 살아보자.'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었으리라 믿는다. 다만, '숨진 채 발견'이라는 문구로 보건대, 그들은 혼자 있었던 것 같다.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흐름이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 '추운데 뭐해. 안에 들어가서 따뜻한 거 마시자.'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옆에 없었던 것이겠지.  


 어쩌면 그들보다 훨씬 먼저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었던 나는 그날 친구들과 함께 있었고, 우리는 따뜻한 라떼를 마셨다. 나는 라떼가 담긴 컵을 손으로 부여잡으며 얼어붙은 손을 녹였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들은 노래는 내 마음을 만졌다. 카더가든이라는 가수의 <그대 나를 일으켜주면>이라는 제목을 가진 노래.


... 메마른 새벽에 검은 고요 속에도
그대 나를 일으켜주면
나 손을 내밀어 품에 가득 안으리...
every night, every night, every night, every night, every night...
... 그래 그래, 지치지 말고...




 그날 이후 나는 서둘러 직장을 그만뒀고, 이후 쉼의 시간을 갖고 있다. 어둠의 시간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첫 번째 조치였다. (그리고 이건 무기력감으로 온몸이 둘러싸여 그 어떤 것도 전격적으로 하지 못하던 내가 전격적으로 이뤄낸 첫 번째 행동이었다.)

 그 이후 아주 사소한 것부터 하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소기를 돌렸고, 강아지와 산책을 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화분을 옮겨 놓았고, 알람을 맞춰놓고 밥을 챙겨 먹었다. 이 모든 일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흩날리는 의식을 힘겹게 붙잡아 생각하고 또 생각했고, 집중할 수 없는 중에 반복해서 의지를 붙잡았고, 두렵고 두려웠으나 용기를 내었고, 있는 힘을 쥐어짜 몸을 움직였다. 모든 것이 매 순간 간절했고, 그게 나의 기도였다. 


 온몸에 짊어진 모래주머니는 절대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쥐어짜듯 힘을 한 데로 모아야 간신히 이불 하나를 갤 수 있을 뿐이다. 모래 주머니를 짊어진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사소한 일이 아니다. 어떤 일도 작지 않고, 어떤 순간도 가볍지 않다. 일반 사람이 보기에는 한심해 보이는 일도, 모래주머니를 짊어진 사람은 이를 악물고 하고 있다. 살아보려고. 살고 싶어서. 마음속으로는 '괜찮다', '괜찮다'를 끝없이 되뇌면서.






 모래주머니를 짊어지고 끝없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글이 어떻게 다가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쓰고 싶었다.


 생각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계획을 세우세요.

 불안함에 몸이 떨리겠지만 결정하세요.

 몸을 일으킬 수도 없겠지만 밖으로 나가보세요.

 전격적으로.

 

 끝은 있답니다.  

 








  










작가의 이전글 바른 자세를 향한 도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