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는 일주일 내내 정장을 입는 사람이었다.
아빠의 옷장에는 온갖 정장과 셔츠, 넥타이가 종류별로 걸려있었다. 세탁과 다림질은 일상이었다. 성격 자체도 워낙 깔끔한 성격이어서 아빠의 옷은 구겨지지도 않았다. 한 여름에도 셔츠 단추를 끝까지 다 채워 꼭 넥타이까지 매곤 했다. 신발 관리는 또 얼마나 철저했던지, 아빠의 오래된 구두는 어떤 새 구두보다도 반질반질했다.
학부모 상담을 한다고 정장을 쫙 빼입은 아빠가 학교에 오면 담임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20대의 젊은 남자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었는데, 우리 아빠가 다녀간 다음날 이 선생님이 정장을 입고 학교에 왔다. 늘 카라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오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입고 오니, 너무나 눈에 띄었다. 학생들과 다른 선생님들은 하루 종일 '오늘 끝나고 선 보러 가느냐'고 물어봤다.
누가 봐도 멋있었던 아빠였지만, 문제는 아빠와 내가 외출을 할 때였다. 둘이 영화라도 보러 가기로 하면, 아빠는 정장을 차려입고 거실에서 나를 기다렸다. 긴팔 셔츠에 턱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넥타이를 맨 모습을 보면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러고 영화관 갈 거냐고 하면 아빠는 다른 입을 옷이 없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며 옷장을 열어보면, 정말 다른 옷이 없었다. 정장 이외에 옷은 너무 지나치게 운동복이어서 차마 그걸 입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빠는 멋쩍게 웃으며 "오늘 영화 보고 나와서 쇼핑 좀 하자. 딸이 좀 골라줘."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쇼핑은 1시간도 채 안되어 아무 소득 없이 끝났다. 니트로 된 적당한 상의를 골라주면서 아빠에게 한 번 입어보라고 했는데, 아빠는 그러면 그 옷을 입고 아주 어색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를 바라보며 서있는 아빠의 팔다리까지 어색할 지경이었다. 나는 한참을 웃다가 그래도 이런 옷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밀어붙이려고 하면 아빠는 이거랑 입을 바지도 필요하고 신발도 있어야 한다면서, 그런 걸 다 사서 언제 또 입겠냐고, 어차피 그런 옷 입을 일도 없으니 괜한데 돈 쓰지 말라고 했다.
참다못한 내가 생일 선물이라며 아빠에게 기어코 옷을 사주면, 아빠는 고맙다고, 정말 필요한 거였다고, 감동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옷을 입지 않았다. 이후 영화를 보러 갈 때면 아빠는 여지없이 정장을 빼입고 방에서 나왔다. 내가 사준 옷 왜 안 입냐고 하면 아빠는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다고 했다. 적응할 시간을 달라고. 아직은 그 옷을 입고 팔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다고.
정장을 차려입은 아빠는 자유로웠다. 다른 사람들은 불편해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는 그 옷을 입고 아빠는 모든 일을 했다. 운전을 했고 삼겹살을 먹었고 여행을 했다. 심지어 입원하러 병원에 갈 때도 아빠는 그 차림 그대로였다. 그 모습만 보면 이 사람이 환자로 병원을 온 건지 비즈니스를 하러 온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빠는 이렇다 할 평상복 한 번 입지 않고 세상을 살았다.
직장생활을 할 때, 나는 늘 구두를 신었다. 옷도 갖춰서 입었지만, 신발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패션의 완성은 신발이라는 말처럼, 편한 셔츠에 슬랙스 차림을 해도 운동화를 신느냐 구두를 신느냐에 따라 그 날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분위기를 내려면 구두를 신어야 했다. 운동화는 전문적인 느낌을 주기 어려웠다. 어느덧 회사 내 자율 복장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젊은 여성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격식 있는 차림새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내가 선호했던 건 기본 하이힐이었다. 그래서 내 신발장은 아무 장식 없는 둥근 코의 기본 하이힐이 색깔별로, 굽 높이 별로 들어찼다. 발로 뛰며 활동하는 일이 많은 날은 조금 낮은 굽의 하이힐을 신었고, 특별한 미팅이 있거나 내 존재감을 드러내야 할 때는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었다.
(갈아 신을 편한 신발을 따로 들고 다닐 때가 많았다. 덕분에 늘 짐이 많았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짐을 싸 본 사람은 알겠지만, 신발은 굉장히 자리 차지를 많이 하는 물품에 속한다. 차곡차곡 쌓을 수도 없고, 구겨 넣을 수도 없다. 그런 신발을 매번 따로 들고 다닌다는 건 꽤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나는 가능한 부피가 적고 가벼운, 아주 말랑말랑한 단화나 슬리퍼를 선택했지만, 이 조차도 신발은 신발이라서 나는 늘 짐을 짊어지고 다녔다.)
그랬던 내가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려고 하니 신을 운동화가 없었다. 당장 운동화부터 주문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운동복도 없었다. 그 흔한 트레이닝복도 없었고, 하다못해 대충 집어 입을 티셔츠와 바지조차 없었다. 운동 한 번 하겠다고 해놓고 돈부터 펑펑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빠 생각이 났다. 아, 그때 아빠가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신발장과 옷장을 한참 들여다보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게 되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가 신발장과 옷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아빠의 옷차림은 아빠가 하는 일을 고스란히 나타냈다. 누구든 아빠를 보기만 해도 아빠가 대충 무슨 일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아빠는 아빠의 일을 좋아해서 그 모습으로 살았지만, 나는 딱히 그랬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어쩌다 보니 그 일을 하게 되었고, 그냥 그 자리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인정받고 나의 커리어를 쌓기 위해.
나는 편히 신을 운동화 한 켤레, 운동복 한 벌 없이 불편하게 살았다. 꿈을 좇았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지난 1년 반 동안 '조금씩이라도 매일 운동하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매일 운동복 차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옷을 사면 늘 운동복을 샀고, 신발을 사면 늘 운동화를 샀다. 어느새 내 옷장에는 운동복이, 신발장에는 운동화가 꽤 많아졌다.
평상시에도 편한 차림을 무조건 우선시하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든 스트레칭할 수 있는 옷을 입고, 오래 걸어도 괜찮은 신발을 신는다. 옷장을 가득 채웠던 빳빳한 셔츠와 재킷들은 점점 한 구석으로 밀려났다. 대신 그 자리에 맨투맨과 후드티와 박스티가 채워지고 있다. 대량 구매해두었던 스타킹은 중고마켓에 내다 팔고, 쭉쭉 늘어나는 바지나 레깅스, 너풀너풀한 치마를 입는다. 운동화를 신고, 질 좋은 가죽 가방 대신 가벼운 천가방을 들고 다니고 있다.
그러면서 나의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
좋은 가방, 좋은 시계, 좋은 차만 보였던 내 눈에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이고 있다.
우선, 운동복을 입은 사람이 길거리에 이렇게 많은지 예전에는 전혀 몰랐다. 모든 사람들이 다 제대로 갖춰 입고 다니는 줄 알았다. 저녁 6시~7시쯤, 산책하고 조깅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지도 몰랐다. 그전에 내가 퇴근하고 집에 올 때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가끔 한 번씩 돈을 펑펑 쓰고 싶은 욕구에 몸이 배배 꼬일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뭘 사면 좋을까'하고 둘러보다 눈길이 멈추는 곳도 예전과 달라졌다. 나는 무언가에 한번 꽂히면 그걸 꼭 가져야 하는 이상한 집념이 있어서, 예전에는 브랜드 가방이나 맞춤 구두와 같은 것들에 꽂혀 여러 사람 힘들게 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무조건 편한 것들에 꽂힌다. 훌렁훌렁한 박스티셔츠라든지, 운동화라든지, 천가방이라든지.
그러다 보니 확실히 돈이 많이 굳는다. 기본 단가가 높은 것들에 꽂혀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갈등하는 시간을 보내던 예전에 비해 지금 꽂히는 것들은 상대적으로 단가가 낮다 보니 돈을 쓸 때 비교적 마음도 편하다. 그때 추구했던 삶과 지금 추구하는 삶 자체가 다르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아무튼 결국 내가 만족하기 위해 하는 일들인데, 그때 수십만 원(때로는 수백만 원)으로 얻었던 만족을 지금은 몇만 원(기껏해야 십몇만 원) 정도면 충분히 얻고도 남으니까.
이것은 마치, 욕구의 종류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다. "뭐 먹고 싶어?"라는 질문에 치킨과 피자를 떠올리기보다 단호박과 무화과를 떠올리고 있는 것처럼.
(얼마 전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뿌링클을 먹었다. 한 입 베어 무는데 진한 뿌링클의 맛이 거북하게 느껴져 깜짝 놀랐다. 너무 짜고, 너무 달고, 너무 기름졌다. 닭을 먹는 느낌이 아니라, 소스를 먹는 느낌. 예전에는 그렇게 맛있었던 뿌링클이었는데. 뿌링클의 잘못이 아니다. 내 욕구가 달라졌다.)
현재의 나를 드러내는 옷은 '편한 옷'이다. 누가 보더라도 나는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훌렁훌렁한 옷을 입고, 훌렁훌렁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스무 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좋아하는 것들에 직진해서 열정을 쏟는 친구다. 이 친구를 대표하는 하나의 단어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 친구는 미친 에너지로 삶을 살았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 일보다도 더 열심히 취미생활을 했다. 하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다고 했다. 자전거를 탔고 한국무용을 했다. 작년에는 아이를 낳았다. 육아만으로도 벅찰 텐데 그 와중에 사이버대학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동아리 활동까지 했다. 아기가 자면 같이 자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을 쪼개 또 온갖 것들을 했다.
친구는 항상 쨍한 색을 좋아했다. 쨍한 빨간색, 쨍한 파란색, 쨍한 노란색. 나도 그동안 이 친구를 떠올리면 그런 쨍한 색이 떠올랐다. 굳이 조명이 없어도 색깔만으로도 눈이 부신, 그런 색.
얼마 전 이 친구가 자기를 대표하는 색을 정해 그 색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에게 어떤 색이 어울릴지 몇 가지 색을 추려보았다면서 나에게도 한번 골라달라고 했다. 나는 색상표를 보며 고민하다가 연분홍, 연보라, 연다홍 같은 색들을 골랐다. 친구는 자기가 고른 색과 같다며 놀라워했다. 친구는 며칠 후 사진을 찍으러 스튜디오에 갔는데, 심지어 사진작가도 우리가 고른 색과 같은 색을 골라주었다고 했다.
현재의 그 친구를 표현하는 색은 연보라색이다. 분홍빛이 도는 연보라색. 20대 때보다 안정적이고, 아이와 함께 성숙하고 있는 느낌. 물론 아직도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긴 하지만. (최근에는 이 친구가 당근 마켓에서 우쿨렐레를 새로 샀다. 어떻게 치는지 하나도 몰라 교본도 새로 샀단다. 아이를 키우느라 아직 시작도 못했지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우쿨렐레가 너무 예쁘다며 나에게 자랑했다. 볼 때마다 설렌다며. 어서 한 곡을 연주해서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다며.)
예전부터 나는 짙은 네이비색의 옷을 많이 입었다. 공부를 할 때도 그랬고, 일을 할 때도 그랬다. 정장을 입을 때도 올블랙보다는 올네이비를 선호했다. 가방과 신발까지 맞춰서 짙은 네이비 계열의 색을 몸에 두르면 그 날은 괜히 자세가 꼿꼿해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색을 물어보면 하얀색이나 하늘색이라고 대답하지만, 정작 손을 자주 뻗는 곳은 짙은 네이비 색이다. 글씨를 쓸 때도 검은색보다는 파란색 펜을 주로 쓰고, 수첩이나 파일을 고를 때도 고르고 나서 보면 결국 짙푸른 색일 때가 대부분이다.
일을 그만두고 집을 이사하면서는 초록색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안녕(安寧)'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참고 <부디, 안녕하세요!>) 진초록도 좋고 연초록도 좋았다. 집 곳곳에서 초록색을 보고 싶어서 화분을 키우기 시작했다. 어차피 베란다에서는 물을 쓸 일이 없으니(김장을 할 것도 아니니까) 초록색으로 바닥을 깔았다. 초록색이 들어간 이불로 바꿨고, 메모지를 붙일 일이 있으면 초록색 스티커로 붙였다.
식당이나 카페를 가도 초록색이 있는 곳을 선호하고, 자리를 잡아도 초록색이 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초록색을 실컷 볼 수 있는 산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등산이나 운동이 목적이 아니라, 그냥 초록색을 보고 싶어서 괜히 산에 다녀오기도 했다.
나의 주관적인 느낌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건 친구의 말을 듣고 알았다. 소름 돋게도, 연보라로 표현되었던 나의 친구는 나를 보고 짙은 네이비와 여린 초록색이 떠오른다고 했다. 지금까지 단단해져 왔고, 또 앞으로 피어날 느낌이라면서.
지금 나는 짙은 네이비 색의 훌렁훌렁한 옷을 입고, 초록색이 잘 꾸며진 카페에 들어와 앉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제 네이비색의 맨투맨을 새로 구입했고(소오름!), 초록색 천가방도 새로 구입했다.(더 소오름!).
3인칭 관점에서 나를 바라보니 몸에 걸치는 아이템들은 압도적으로 네이비 색이 많았고, 최근 내 주위에는 늘 초록색이 곁에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온 몸으로 나를 표현하고 있었고, 추구하는 삶을 살고자 행동하고 있었다.
현재의 나는 꽤나 단단하고, 또 피어나고 있다.
지금 나의 시간에 '억지로'는 없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일부러' 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나를 꾸미지 않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무언가를 위해 일부러 나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저 내가 원하는 옷을 입고, 좋아하는 것들을 곁에 둔다. 그 자체가 나의 모습이 되었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꾸미지 않은 원래의 나. '나'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고 온 몸으로 나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는 편한 운동화와 가벼운 천가방이 있다. 따로 신발을 한 켤레 더 들고 다니며 짐을 늘리는 일 따위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편안하게, 그리고 부담 없이, 나는 온전한 나를 드러낸다.
덕분에, 보이는 모습이 전부인 사람이 되었다. 지금 보이는 모습 그대로가 나의 원래 모습이다. 투명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을 보면 그게 그렇게 부러웠었는데, 지금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
(지금껏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은 날을 살아가다 보면, 잘 보이기 위해 나를 꾸미는 일이 다시 생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또 억지로 불편한 옷을 입고 높은 구두를 신고 묵직한 가방을 짊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어느 순간 내 삶이 그런 식으로 불편해졌을 때, 이 글을 우연히라도 다시 보고 흠칫 놀라길. 반성해야 한다. 그건 내가 아니니까.)
+)
이 만년필은 앞에서 말한 그 친구가 지난 내 생일날 선물로 준 만년필이다. '만년필'이란 것을 받아본 게 처음이라 무척 의미 있게 다가왔고, 심지어 각인까지 해주어서 너무나 감동이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이 만년필은 무려 '여린 초록색'이었다.(소오름!) 그리고 이 만년필로 글씨를 쓰면 '짙은 네이비색'의 잉크가 나온다.(더 소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