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일기16-해남 저수지 산책길, 마음길

by 제대로 삶
해남 저수지 산책길

제목: 해남 저수지 산책길, 마음길


금요일 저녁 6시쯤에 출발해 자정이 넘어 해남 시골집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차 뒷좌석에 앉아서 오는 것만으로도 피곤하고 온몸이 뻐근하다. 어머니께 우리의 도착을 알리고 절을 올리고 미리 깔아놓은 이불 위에 등을 대고 눕는다. 피곤한데 잠이 안 온다. 장판에 뜨끈뜨끈한 열기와 내일이면 5월인데도 코끝이 시원하고 춥다.


잠 안 온다더니 어느새 잠들어 아침이다.

부엌 쪽에서 쿠쿠 밥솥이 뜸 들인다고 음성 음이 나오는 걸 보아서 어머니가 아침밥을 안쳐놓고 밭에 나가셨나 보다. 천근만근 몸을 일으켜 부엌에 나가 큰 솥을 열어보니 토종닭 한 마리가 고스란히 대추와 마늘이랑 푹 삶아서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다. 토종닭 먹고 닭죽 끓여 김치랑 반찬 꺼내 먹으면 아침은 훌륭하게 마칠 것 같다. 어젯밤 보지 못한 집안을 죽 눈으로 스캔한다. 밥 먹고 부엌 정리하고 청소를 하면 오늘 하루도 다 갈 거 같았다. 막히지 않고 와도 6시간은 걸리는 거리라 2박 3일 일정을 잡아도 실은 내려오는 날, 올라가는 날을 제외하면 하루만 온전히 머물고 가는 일정이다. 그래서 항상 빡빡하고 하루 만에 이것저것 해야 할 것이 많아서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는 일정이다.


어머니는 80이 넘어 85세가 다가오도록 혼자서 농사를 지으신다. 지금은 논농사는 다른 이에게 맡겨 쌀로 품삯을 받고 밭농사만 지으시는데 그 규모가 텃밭 수준이 아니라 농장 수준이다.

어머니 주 업종은 마늘, 고추, 양파, 깨, 고구마 등이다. 고사리를 하신 지는 몇 해 안 되셨다. 된장, 간장, 고추장은 겨울 부수입으로 하신다.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쉬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냥 기계처럼 일하신다. 결혼 전에는 농사는 그냥 씨뿌리면 거저 되는 줄 알았다. 막상 옆에서 보니 매일 아침저녁으로 손이 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젠 안다. 뼛골 빠지게 하는 말과 골병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하다. 시어머니이지만 성실한 모습에 존경스러운 마음도 든다. 존경이라는 말은 대단한 인물이나 성공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머니를 보고 알았다.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저렇게 일할 자신이 없으므로 농사일이라는 것이 태양 아래서 등 구부리고 손으로 무언가를 무한 반복하는 것이다.


시지프의 신화에서처럼 끝없이 돌을 굴려 오르고 다시 떨어지는 돌을 굴려 오르는 일이랑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시지프가 돌을 올리고 다시 떨어지는 돌을 보며 인간의 가혹한 운명 같은 걸 생각하지만 막상 한나절이라도 농사일 도우려고 밭에 나가 일하다 보면 한 시간도 너무 힘들다는 것을 느껴 그새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호미질도 낫질도 못 한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은 다는 데 시집와서 20년인데 거기서 거기다. 그렇다고 맨손으로 할 수 있는 고추 따기, 마늘쫑지 따기, 깻잎 따기를 잘하냐 그렇지도 않다. 이쯤에서 나는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고 농사 머리가 없으면 골병을 얻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시간 조금 넘어 집으로 돌아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 잘하는 일을 한다. 어머니는 농사일만 하신다. 집안일은 뒷전이다. 그래서 시골집은 항상 어수선하고 지저분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청소와 정리정돈이다. 우선 냉장고에서 오래된 음식, 까만 비닐봉지에 쌓여 있는 것들 다 꺼내 버릴 거 버리고 종류대로 모아서 투명비닐백에 잘 정리한다. 그릇 냄비도 안 쓰는 것들은 집어놓고, 오래된 양념통들은 버리고 새 달력을 깔아 양념장 정리하고 가스레인지까지 닦으면 일단락된다. 안방에 가서 어머니 빨래해서 쌓아놓은 옷들을 한데 모아 옷장에 정리한다. 여름옷, 겨울옷 섞여 있는 것을 겨울옷은 한데 모아 걸어놓고 여름옷은 꺼내입기 좋은 곳에 모아놓는다. 속옷은 속옷대로, 일하는 바지들을 모아 서랍에 정리하고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잡동사니는 침대 옆 화장대에 나름 잘 올려놓는다. 헌 이불 걷어내고 새 이불 깔고 나면 집 전체를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하면 청소의 마무리가 된다. 시간이 짧아서 눈에 거슬리는 작은방 2개는 바닥 청소만 하고 문을 닫아놓는다. 굴러다니는 빨래 모아서 세탁기 돌리기 시작하면서 청소를 마무리되고 점심때가 다가온다.


어머니와 남편도 밭에서 돌아왔다. 장에 가서 뻘낙지도 사 오고 생선도 사신다. 점심에는 산 낙지만 먹었는데도 배가 부르다. 머리통은 따로 냄비에 익혀서 연포탕처럼 먹는다. 낙지를 못 먹었는데 지금은 낙지 사준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점심 먹고 오후 4시쯤에 소주 한병 들고 성묘에 나선다. 어제 비가 와서인지 바람이 불지만, 하늘이 정말 예술이다. 뒷산에 대숲은 바람에 물소리처럼 나고 하늘에 구름이 바람에 쫓기듯 후다닥 지나간다. 하늘이 이렇게 푸르고 야트막한 산 묘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앞에 탁 트여 논밭 위로 하늘이 같은 하늘이지만 더 푸르게 와닿는다. 남편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시골집에 내려갔다 오는 마음을 이해가 갈 듯도 하다.


터벅터벅 집으로 내려오다 내친김에 집을 지나쳐 저수지까지 간다. 한두 시간 후면 해가 질 것 같다. 뒷산 머루에 해가 걸려 있으니 곧 어두워지리라 보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저수지는 평온하다 바람에 흔들리다 산과 들과 어울려 아주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관광안내책자의 한 줄도 차지하지 못하는 그저 그런 한적한 시골이다. 버스는 하루 세 번 밖에 오지 않는 이곳이 고향이 아니면 찾아오지 않는 그런 마을이다.


눈앞에 풍경이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운데 난 이곳을 20년을 오고 갔는데 이곳이 이리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해남 가는 길은 고생길이고 눈물길이고 고단한 여정이었다. 왜 난 그동안 시골집 울타리 안에서 발발거리며 왔다 갔다 했지 이곳을 수시로 찾고 음미하지 못했을까 아쉬움이 남았다. 이곳이 아름다웠던 건 오늘만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얼마 있지도 않았는데 어둑어둑해진다. 산골 마을은 밤이 순식간에 찾아온다. 집으로 돌아오며 다짐한다. 다음에는 캠핑 의자를 가지고 와서 정말 오랜 시간 머물다가 가야지,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안개가 낀 저수지도 봐야겠다 하면서 말이다.


해남 올 때마다 집 안에만 머물지 말고 한적하고 평화로운 풍경들을 놓치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귀한 시간을 청소에, 농사에만 매몰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면서 저녁에 마당에서 고기구워 먹을 생각에 발길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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