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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바 Sep 18. 2024

이불만 싸들고 갔던 첫 번째 차박


전국 팔도로 공연을 다니는 남편에게 차는 매우 중요한 존재다. 차 안에 온갖 의상과 공연 소품들, 각종 잔 짐을 다 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연희자로 활동하게 되면서 남편에게도 첫 번째 차가 생겼다. 


족히 10년은 훌쩍 넘은 아반떼 XD였다. 일명 아방이. 


아방이의 원래 주인은 누나였다. 지방에 있는 회사에 취직하게 되면서 구입하게 된 차였다. 아방이를 몰고 다니며 누나는 열심히 회사 생활을 했고, 같은 직장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낳았다. 세 가족이 되면서 누나는 아방이를 어머니에게 100만 원에 넘기고 새로운 SUV를 구입했다. 


어머니는 아방이와 함께 여러 명소들을 다녔다. 봄에는 꽃놀이, 여름에는 해수욕장, 가을에는 단풍놀이, 겨울에는 온천까지. 그렇게 년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이름처럼 아방하니 귀여웠던 외모에 세월의 때가 묻고 곳곳에 잔고장이 생겼다. 


아방이는 결국 지친 패잔병의 모습으로 10년 만에 남편에게까지 왔다. 


처음에는 마냥 좋았다. 남편은 공연 때마다 선배들의 차를 얻어 타지 않을 수 있어 좋았고, 나는 가끔 외곽으로 나가 콧바람을 쐬고 돌아올 수 있어 좋았다. 돈가스 하나 겨우 먹고 돌아오는 길이어도 그렇게 산뜻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아방이가 반항을 시작했다. 뒷좌석의 창문이 올라가지 않더니, 급기야 중간에 차가 멈추는 일까지 종종 발생했다. 결국 남편은 결단을 내렸다. 아방이를 보내주기로. 


새 차를 알아보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부러 티를 내진 않았지만 걱정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때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게다가 둘 다 프리랜서였기에 수입 역시 들쭉날쭉했다. 빤한 경제 상황에서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자동차 할부금을 펑크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일단 그것부터 걱정이 됐다.


게다가 가계 사정을 생각해 모닝이나 레이 같은 소형차를 알아보고 있을 줄 알았던 남편이 중대형 SUV를 염두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어떻게 하면 부드러운 말투로 그 생각을 고쳐 먹게 해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남편은 실로 단호했다. 여러 SUV를 시승해 본 끝에 남편이 선택한 차는 바로, 시승도 해보지 않은 신차. 7인승 팰리세이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남편이 부득불 중형 SUV를 고집한 이유가 바로 '차박'을 위한 것이었음을. 이미 남편의 머릿속에는 차박을 위한 모든 계산이 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연 때문에 아침부터 나가 있던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십 분 뒤에 신이문역 앞으로."


아아, 오늘 오랜만에 김말이 아저씨가 왔구나! 나는 신이문역 앞 포장마차에서 파는 김말이 튀김을 무척 좋아했다. 다른 곳에 비해 크기도 컸고 맛도 있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여는 날이 들쭉날쭉 하다는 것. 아저씨가 팔고 싶으면 팔고, 팔기 싫으면 안 파는 배짱 있는 노점이었다. 


떡볶이도 사고, 김말이도 넉넉하게 다섯 개쯤 사고. 어묵 국물도 살까? 이런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데 멀리서도 번쩍번쩍 빛나는 새 차가 보였다. 


설마, 저 차가 우리 차? 후다닥 그쪽으로 뛰어가니 반들하게 빛나는 팰리세이드가 나를 향해 깜빡이를 두 번 깜빡였다. 마치 귀엽게 윙크라도 하듯.


"가자."


남편은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말했다. 이미 남편의 손에는 따끈따끈한 김말이 봉투까지 들려 있었다. 


"어딜?"


"차박."


"헐. 이렇게 갑자기?"


아직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 2월 말이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차 안에서 잠을 잔다고? 얼어 죽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나는 한숨을 몰아쉬며 팽팽 머리를 굴렸다. 그동안 차박에 대해 공부한 게 있던 터라, 다짜고짜 전문가처럼 장비 타령부터 했다. 


"평탄화 매트가 없어서 누우면 허리 엄청 배길 걸? 그리고 동계 침낭은? 차 안이 얼마나 추운데!"


내 말에 남편은 곰곰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다시 집 쪽으로 차를 돌렸다. 그래, 그렇게 고대하던 차를 드디어 인도받았으니 마음이 얼마나 벅찼겠어. 남편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남편은 집 안으로 후다닥 뛰어가더니 간신히 극세사 이불과 베개 두 개만 들고 다시 나왔다. 


"일단 이렇게 가보자고. 응?"


이쯤 되니 어쩔 수 없었다. 호기롭게 이불을 들고 앞서 걸어가는 남편의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서울에서 가깝지만 바다도 볼 수 있는 곳. 우리는 을왕리로 차를 몰았다. 느긋하게 핸들을 꺾는 남편의 모습도, 빳빳한 시트의 느낌도, 쾌적한 차도 내 마음을 제법 들뜨게 했다. 우리는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을왕리 해수욕장 주차장에 겨우 차를 세웠다. 


'이게 그렇게 말하던 차박인가....?'


열심히 챙겨봤던 유튜브 영상 속 모습과 달랐다. 


'그냥 좀 고급스런 노숙 아닐까.....?'


주변이 온통 캄캄했다. 휴가철이면 휘황찬란하게 불이 켜져 있는 곳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짙은 정적만 감돌았다. 게다가 물이 쫙 빠져 버린 서해 바다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이걸 보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나? 나는 극세사 이불을 꽁꽁 싸매고, 온통 식어버린 김말이만 연신 씹어댔다. 


"잠이나 자자. 할 것도 없는데."


나는 있는 대로 툴툴거리며 남편을 따라 뒷좌석의 의자를 눕혔다. 촥, 소리와 함께 생각보다 평평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물론 평탄화 매트를 깔지 않아 위쪽 공간이 좀 높았지만 그런대로 보기 괜찮았다. 이불을 깔고 그 위에 바로 누웠다. 그때였다.


"엇.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솔직히 말해 꽤 편안했다. 남편이 핫팩을 두 개 터뜨려 이불 안에 넣어주자 금세 온기마저 감돌았다. 


"저기 위에 별 봐 봐."


남편이 시동을 킨 다음 선루프 창을 열자, 두 눈에 다 담기지 않을 만큼 많은 별이 이쪽으로 쏟아졌다. 순간 없던 낭만까지 생겼다. 차 안에서 잠을 잔 것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빛나는 별을 실컷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갑자기 차박이라는 것이 꽤 좋아졌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불면증이 있던 내가 열 시간이나 넘게 푹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실제로 나는 지금도 차박만 가면 숙면을 취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남편과 진지하게 토론을 한 적도 있다. 분명 집에 있는 침대보다 불편한 건 사실인데 왜 그럴까?


남편과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마치 동굴처럼, 혹은 캡슐처럼 둘러싸인 공간이 주는 안온함? 나른함? 뭐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며칠 만에 잠을 푹 잤으니 몸도 마음도 개운해졌다. 아직 조용한 을왕리의 아침. 남편이 호기롭게 트렁크의 문을 열었다.


"와.....! 대박."


눈앞에 펼쳐진 풍경 앞에 입을 헤, 벌리고 기함했다. 잔잔한 물결의 푸른 바다가 바로 눈 앞에 있었다. 햇살에 밝게 빛나는 윤슬은 덤이었다. 아니, 을왕리 바다가 이렇게 예뻤나? 무엇보다 일어나자마자 보게 된 풍경이 고요한 아침 바다라는 게 기가 막혔다. 


"흠흠. 이 정도면 할 만하네, 차박."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나는 앞에 펼쳐진 바다의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아침은 컵라면과 식은 삼각김밥이었지만, 풍경이 좋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맛있었다. 등을 차체에 기대고 늘어지게 앉아 책을 읽어도 좋았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밖으로 나와 백사장을 걸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느긋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차박의 매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제일로 꼽는 건 이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바로 눈앞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것. 캠핑을 간다고 해도 텐트를 쳐야 하기 때문에, 바다와 몇 걸음은 족히 떨어져 있다. 아무리 전망 좋은 호텔이라 해도 창 너머로 봐야 한다. 


그러나 차박은 다르다. 트렁크 문만 열면, 내 눈앞에 바로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다. 


차박이 좋은 이유는 또 있다. 합법적으로 차를 세울 있는 곳이라면 숲 속이든 계곡 앞이든 어디든 차박이 가능하다는 것. 작은 테이블이나 경량 의자 정도를 가지고 있다면 훨씬 좋다. 자연의 경치를 벗 삼아 커피만 마셔도 낭만적인 순간이 만들어진다. 


이제 막 차박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차박용품은 뭘 챙겨야 해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씩 웃으며 대답한다.


"차만 있으면 차박은 가능합니다. 그냥 이불만 싸들고 한 번 가보세요."


차박은 일단 경험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비싼 장비를 사는 것보다, 가볍게 집에 있는 이불과 베개만 챙겨 훌쩍 떠나보는 것을 추천한다. 먹거리는 주변에서 사 먹거나 포장해 가면 그만이다. (단, 쓰레기는 잘 챙겨서 올 것)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면 내게 필요한 용품들이 뭔지, 나의 차박 스타일은 어떤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차박이 좋은 이유 또 하나. 막상 나오면 할 게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둘이서 대화를 정말 많이 하게 된다. 가끔 싸울 일이 있어도 시원한 바닷바람맞으며 대화를 하게 되면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어진다. 실제로 우리 부부는 차박을 시작하면서부터 서로에 대해 꽤 많이 알게 됐다. 차박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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