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바 Oct 12. 2024

이 순간을 위해 차박을 시작했는지도

차박을 하게 된다면 꼭 한 번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우리 부모님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올해 68세인데 아직 용달 일을 하신다. 65세인 엄마 역시 요양보호사로 일하신다. 두 분이 일을 하시다 보니 짬을 내서 같이 차박 가는 일도 어려웠다. 그러다 우연치 않게 여름휴가 일정이 딱 맞게 됐다. 


예전에 은바와 가 본 적 있었던 '용오름 계곡'으로 장소를 잡은 뒤, 두 가족 2박 3일 차박 준비를 시작했다. 당연히 차박이 처음인 부모님은 장비가 하나도 없었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가 다 챙겨야 했다. 짐들로 차가 터질 것 같았다. 거의 민족 대이동 수준이랄까? 아이스박스만 무려 3개였다. 


아무래도 세팅하는 데 정신이 없을 것 같아, 부모님은 좀 늦게 오시라고 했다. 커다란 타프 하나를 설치하고, 그 안에 쉘터를 쳤다. 양 사이드에 야전침대를 깔고 중간에는 테이블을 놓았다. 우리는 오랜만에 야전 침대에서 자기로 하고, 부모님은 차박을 한번 경험해 보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차 안에 극세사 매트도 깔았다. 


두 시간 만에 세팅을 마치니 바로 걱정부터 됐다. 챙긴다고 챙겼는데, 과연 부모님이 차박을 좋아하실까? 막상 초대하긴 했지만 과연 이게 옳은 결정일까? 때 늦은 고민이 계속됐다. 무엇보다 걱정됐던 건, 2박 3일 동안 도대체 같이 뭘 해야 하나 싶어서였다.


"엄마 아빠랑 차박 괜찮을까?"


내 말에 은바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눈빛이었다. 그래도 내가 불안해하자, 은바는 핸드폰 메모장을 켠 다음 앞으로 쑥 내밀었다. 2박 3일의 일정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래, 이렇게만 하면 되겠지. 그냥 은바에게 다 맡겨버리자.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님과 친하지 않았다. 서로 좀 어색하달까. 워낙 어렸을 때부터 가족끼리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아 더 그랬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열일곱 살에 돈을 벌기 위해 강경에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시작은 청계천에 있는 조명 가게였다. 밤낮없이 일을 하며 열심히 기술을 익혔고, 번 돈은 모두 시골에 있는 가족들에게 부쳤다. 그리고 10년 뒤, 엄마를 만났다. 둘 다 워낙 가난했던 탓에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정릉에 있는 셋방을 겨우 구해 살림부터 합쳤다. 


나와 동생이 생기자 아버지는 그동안 번 돈을 모두 털어 구의동에 '한미조명'이라는 가게를 열었다. 도소매 다 하는 곳이었는데, 아버지는 주로 아파트 모델하우스의 조명 다는 일을 하느라 항상 바빴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가족보다는 일과 친구가 우선인 사람이었다. 늘 술과 담배에 절어 있었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어쩌다 쉬는 날이라도 생기면 항상 밖에서 친구들과 만났다. 그러다 보니 남들 다 가는 그 흔한 가족 여행 한번 못 가 봤다.


엄마는 온종일 가게만 봤다. 어렸을 내가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던 곳도 바로 조명가게였다. 나는 이발소 딸이었던 선희와 친구가 되었고, 우리는 옆에 있는 약국에 놀러 가 약사 언니와 함께 과자를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대신 엄마가 얼려 놓은 콜라 얼음을 먹으며 보냈고, 겨울에는 근처에 있는 밥집에서 칼국수를 배달시켜 먹으며 보냈다. 가끔 병원을 가야 할 잠깐 문을 잠그는 빼고는, 365일 '한미조명'의 문이 닫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IMF가 찾아왔다. 이발소도 문을 닫았고, 약국도 문을 닫았고, 한미조명도 문을 닫았다. 아버지는 가게를 정리한 뒤로 청과물시장에서 잡일을 하거나, 할머니가 있는 시골로 내려가 방울토마토 농사를 짓기도 했다. 주식을 하다 돈을 잃기도 했고, 노가다를 하다 다리를 다쳐 일 년 동안 집에만 있던 적도 있었다. 


대신 엄마가 생계를 돌봤다. 가지고 있던 돈으로 고시원 아래층에 있는 빈 점포에 분식집을 열었다.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호프집으로 업종을 변경하고 난 뒤, 열심히 닭을 튀기고 생맥주를 내렸지만 이번에는 생각보다 더 안 됐다. 3년 만에 가게를 정리하고 엄마는 근처 다른 음식점 주방에 나가 일을 했다. 


당시 나는 예고 문창과에 재학 중이었다. 매일 서울에서 안양까지 등교를 했다. 집안 사정이 빤하니 일단 빨리 대학부터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이 사춘기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방황할 틈도 없었다.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골방에 틀어박혀 열심히 글만 썼다. 오로지 수시에 붙기 위해서. 대학에 가기 위해서.


결국 문학특기생으로 1학기 수시에 운 좋게 붙었다. 당연히 부모님은 좋아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의 진정한 사춘기가 시작됐다. 


나의 대학시절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술, 연애, 알바. 


일 년 남짓 학교를 다니고 바로 휴학을 했다. 온종일 알바를 하고 끝나자마자 친구들과 만나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틈틈이 연애도 했으니 하루가 다 바빴다. 늦은 시간까지 귀가하지 않는 딸이 걱정된 부모님은 전화통에 불이 나도록 전화를 했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술에 취해 겨우 새벽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부모님과 전쟁 같은 싸움이 시작됐다. 나는 시위라도 하듯 입을 꾹 다물고 부모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솔직히 속으로 그런 생각도 했다. 갑자기 나한테 웬 관심? 그냥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쭉 무관심으로 대해주시죠. 제가 알아서 합니다.


지긋지긋한 다툼이 계속됐다. 나는 휴학과 복학을 거듭한 끝에 결국 6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남은 건 오로지 졸업장 하나 뿐.


6개월 동안 반 백수로 생활하며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어찌저찌 판교에 있는 한 IT 기업의 마케팅 부서에 취직했다. 마케팅의 '마'자도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일단 들어가서 부딪쳐보기로 했다. 온갖 산전수전 다 겪으며 겨우 신입사원 티를 벗었을 때. 나의 또 다른 방황이 시작됐다. 


출근할 때마다 회사 건물 위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순간 현타가 왔다. 한때는 작가가 되길 꿈꾸며 그 누구보다 가열차게 글만 썼던 적이 있었는데. 봐도 봐도 모르겠는 숫자가 적힌 보고서만 들여다보며 하루를 다 보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어딘가에 두고 온 물건처럼 작가라는 꿈이 새록 떠올랐다.


나는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졌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라도, 아니 후회를 한다 해도 좀 더 어린 나이에 후회를 하는 게 낫지 않나? 뭐 이런 생각이었다. 당연히 부모님은 입을 벌리고 기함했다. 겨우 정신 차리고 회사 잘 다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작가가 되겠다니. 대학원에 가겠다니.


어찌저찌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여 결국 대학원에 입학했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졸업보다 결혼을 먼저 하게 됐다. 그렇게 된 이유가 좀 어이없긴 한데, '집' 때문이었다. 3년 정도 연애를 하면서 은바와 나는 누가 먼저 '결혼'이란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가끔 부동산에 들어가 집을 보고 다녔다. 


그러다 작은 단독주택 하나를 보게 됐다. 마당이 있었고 거실이 넓었다. 열 일곱 평 정도 되는 작은 집이었지만 우리 두 사람이 살기에는 충분히 차고 넘칠 만큼 좋았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한 달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 뿐이었다. 결국 은바와 나는 부모님께 이실직고하기로 했다. 먼저 혼인신고부터 하고 전세금을 대출받아 결혼 생활을 시작해 보겠다고. 


차분하게 우리의 미래 계획에 대해 말하며 설득을 시작했다. 부모님은 당연히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대뜸 살림부터 차리려는 우리 두 사람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러나 며칠을 설득한 끝에 겨우 승낙을 받았고, 우리는 결혼식을 일단 뒤로 미루고 혼인신고부터 했다. 


그렇게 원하던 집에 들어가게 된 우리는 쾌재를 불렀다. 솔직히 걱정되는 일도 많았지만, 그것보단 당장의 행복이 소중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결혼보다 부모님에게서 '독립'을 하게 됐다는 사실이 더 기뻤던 것 같다. 


며칠 뒤. 엄마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느긋하게 야경을 보며 맥주 한 잔 들이켜고 있을 때였다. 엄마가 대뜸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네가 왜 그렇게 결혼을 해야 하니. 도대체 뭐가 급하다고."


좋은 일이라고, 어쨌든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둘이서 어쨌든 차분히 일을 마쳤다고, 분명 다행이라 말했던 엄마였다. 


"앞으로 둘이서 어떻게 벌어먹고 살려고."


걱정하지 말라고, 잘 살 수 있다고 호기롭게 말하며 엄마를 달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는 정말 철이 없었던 것 같다. 미래가 불투명한 예술가 둘이서 앞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솔직히 대책은 없었다. 그냥 무작정 독립부터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남편을 만났다는 것이다. 7년째 옆에서 보건대 은바는 정말 우리 부모님을 살뜰히 보살핀다. 내가 한 번도 하지 못한 딸 노릇을 사위가 다 한다. 무엇보다 나처럼 까칠하지 않고 항상 다정한 말투로 전화를 받는다. 가끔 나 빼고 부모님과 함께 술도 마시고 데이트도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부모님은 나보다 은바가 더 편한 눈치다. 


"어머니 다 오신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캠핑장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아니라 은바에게 전화를 걸었다. 쫄래쫄래 마중을 나가니 주차장에서 짐을 꺼내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일찌감치 와서 이미 설치해 놓은 쉘터 쪽으로 안내하니 보자마자 엄마가 입을 헤, 벌리고 기함했다. 


"이야. 살림살이가 장난이 아니네. 진짜 어마어마하다."


아버지도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다 싣고 왔니?"


"그냥 집을 하나 만든다고 생각하면 돼요, 아버지."


은바의 살가운 말에 아버지는 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메모장에 빼곡히 적어놓은 2박 3일의 일정이 시작됐다. 점심은 닭백숙. 세 마리를 삶기 위해 다이소에서 커다란 솥도 구입했다. 은바가 한 시간 동안 푹 고운 닭백숙을 맛본 엄마가 바로 말을 이었다. 


"내가 삶은 것보다 더 고소하네."


그 말에 아빠가 화답했다.


"밖에서 먹으니까 더 맛있는 거야."


근데 우리 엄마가 이렇게나 잘 드셨나? 평소 입이 짧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한 마리를 다 드셨다. 기분이 좋았던 모양인지 맥주도 두 캔이나 깠다. 아버지는 이미 식사를 마치고 계곡 갈 준비부터 했다. 은바의 두 번째 일과가 바로 시작됐다. 바로 보트 기사.


흡사 아이들이 탈 법한 커다란 보트에 바람을 채운 뒤 계곡으로 내려갔다. 은바는 엄마를 보트 위에 태우고 열심히 밀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어찌나 섬세한지. 물을 무서워하는 엄마도 느긋하게 웃으며 주변 풍경을 여유롭게 구경하고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 좋으세요?"


땀을 뻘뻘 흘리며 은바가 물었다.


"응, 신선놀음 하는 것 같다. 어머. 소나무 향기도 솔솔 나네?"


물놀이를 다 하고 난 다음에는 넷이서 야전 침대에 누워 낮잠도 자고 유튜브 영상도 봤다. 저녁이 되자 은바는 숯을 피울 준비부터 했다. 바야흐로 은바의 세 번째 일정. 장어 3kg 굽기. 소금구이 두 마리, 양념구이 두 마리. 


내가 그 옆에서 곁들여 먹을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으니 어느새 엄마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난 네가 아무것도 못하는 줄 알았는데."


"나도 할 때는 해."


피식 웃으며 찌개를 그릇에 덜었다. 은바는 그새 완성한 장어구이를 들고 쉘터 안으로 왔다. 우리 네 사람은 소주를 마신 뒤, 장어를 입에 넣었다. 오동통하게 잘 익은 장어가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니. 나 왜 걱정한 거야?'


모든 게 다 자연스럽고 좋았다. 단 한순간도 어색하지 않았고, 마치 예전부터 함께 캠핑을 하던 친구들처럼 익숙하고 편했다. 무엇보다 부모님과 대화를 정말 많이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일하는 요양원 안에서 '인싸' 인지도 처음 알게 됐다.


"엄마 무슨 모임이 4개나 있어?"


"그냥 아줌마들끼리 만나서 호프 한잔씩 마시는 모임이야."


엄마가 웬일로 먼저 소주잔을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 영상 보니까 잔 부딪칠 때마다 뭐라고 하던데?"


"아, 어머니. 들어가자!"


들어가자! 는 은바가 만든 건배사다. 바바TV 영상에서 하도 '들어가자~'를 많이 외쳤던 탓인지 엄마도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도 들어가자!"


아버지의 말에 웃음이 다 터졌다. 아니, 우리 아버지가 원래 저렇게 호방한 사람이었나? 삼십몇 년 만에 부모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참 많았다. 


은바의 마지막 일과는 '별 가이드'였다. 용오름 계곡은 별 맛집으로 유명한데, 특히 계곡 다리 위에서 보는 밤하늘이 기가 막혔다. 검은 하늘에 깨처럼 톡톡 박혀 있는 별들이 얼마나 예쁜지. 심지어 나는 이곳에서 난생처음 별똥별도 봤었다. 


"별이 잘 안 보이는데?"


엄마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자, 은바가 느긋하게 말했다.


"어머니 그럼 눈을 10초만 감고 다시 떠 보세요."


잠시 후. 


"우와, 여기 진짜 별 많네!"


엄마의 말에 살짝 뭉클한 마음도 들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나는 가족끼리 캠핑을 가는 애들이 무척 부러웠었다. 무엇보다 캠핑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내가 보기에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사람이었다. 막연히 나도 가족 캠핑을 가보고 싶다, 생각만 했었는데. 어릴 때부터 꿈꿨던 모든 것을 오늘 다 체험해본 것 같았다. 


쉘터로 돌아오는 길,


"휴가를 더 연장하면 안 되나?"


아직 하루가 더 남아있는데 아버지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에게도 이 캠핑이 퍽 좋았던 모양이다. 엄마가 아버지의 반응을 눈치채고 한 마디 얹었다.


"앞으로 애들한테 맨날 가자고 하면 안 돼요."


엄마의 말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나는 그게 엄마가 본인의 속마음을 돌려서 말한 것이라는 걸 잘 안다. 앞으로 엄마한테 계절마다 딱 한 번씩만 갈 거라고 말해야겠다. 내심 이렇게 다짐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꽤 좋았다. 


"우리 든든한 사위가 있어서 너무 재밌게 노네."


엄마의 말에 은바가 넉살 좋게 대답했다.


"어머니 그럼 카메라 보고 손하트 한번 날려주세요."


 "그래, 우리 사위 최고다!"


다음 날 일정도 은바의 계획대로 척척 진행됐다. 무사히 2박 3일의 차박을 마치고 나서 집에 돌아왔다. 영상을 편집한 뒤 업로드했다. 제목은 [장인 장모님의 첫 번째 차박]


그리고 은바에게 새로운 별명이 하나 생겼다. 



바로 국민 사위.


며칠 뒤, 엄마에게서 문자 하나가 왔다. 요양원에서 같이 일하는 동생들과 재밌게 영상을 봤다면서, 친구들이 언제 자기도 데려갈 거냐고 계속 묻는단다. '초대캠'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답문을 쓰려는 그때,


- 네가 민서방이랑 재밌게 사는 거 같아서 엄마도 좋아. 엄마는 그거면 돼.


라는 문자 하나가 더 도착했다. 


그 문자를 보자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차박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내 남편이 다른 아니라, 차박을 취미로 가져줘서 너무 고맙다고도. 


은바 덕분에 부모님과 처음으로 웃음이 가득한 휴가를 보냈다. 같이 쉘터를 정리하고, 테이블을 옮기고, 고기도 구워 먹고, 밥도 해 먹고, 수영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부모님과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했다. 하나하나 모든 순간이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이렇게까지 차박을 좋아하실 줄은 몰랐다.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시간을 내서 부모님과 더 많은 곳을 돌아다녀보고 싶다. 더 좋은 계곡, 더 좋은 산, 더 예쁜 바다, 더 많은 별이 보이는 곳을 찾아 떠나보고 싶다.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이와 같은 좋은 순간들이 퍽 기대가 된다. 





이전 13화 자영업자의 고충은 저희가 잘 알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