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M May 22. 2021

[반항의 대중음악가] 데이비드 보위③

화려한 음악의 종합 예술가, 독일 통일의 일등공신

  따지고 보면 독일이라는 국가의 분단은 비극이지만 보위는 최대한 밝은 분위기로 《"Heroes"》를 이끌었다. 사회에 대한 분노보다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우선적으로 다뤘다. 덕분에 보위는 일반 시민들의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복잡한 정치 논리가 아닌 당장 어려운 사람들을 지켜주는 따뜻한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보통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누군가 이끌어줄 사람이 당연히 필요하고, 때로는 돌봐줄 사람도 필요하다. 보위는 1977년 10월 『Melody Maker』와의 인터뷰에서 “《"Heroes"》에는 연민이 담겨있기를 희망한다. 스스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다. 우리들 역시 스스로 절망적 상황에 빠져있다”며 “알다시피 사람들이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보위는 베를린에서 머물며 혁혁한 음악적 성과를 이뤄냈고 마약 중독에서도 벗어났다. 자신감을 얻은 보위는 베를린을 떠나 영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새로운 음악을 하고자 했다. 1980년 2월, 보위가 아내 메리 안젤라 바넷과 이혼하면서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계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1980년 발매한 앨범 《Scary Monsters (and Super Creeps)》와 싱글 <Ashes to Ashes>는 모두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며 1970년대 못지않은 인기를 유지했다. 

  보위는 대중들과의 만남도 늘려가면서 간만에 그의 페르소나도 들고 나왔다. 바로 <Space Oddity> 가사에 등장했던 우주인 ‘메이저 톰’이다. 보위는 <Space Oddity>에서 우주 비행 중인 메이저 톰이 회로 오작동으로 지구에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을 노래했다면 <Ashes to Ashes>에서는 메이저 톰을 마약 중독자로 규정해버렸다. 메이저 톰의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메이저 톰을 통해 보위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노래 분위기가 어둡거나 우울하지는 않았다. 

  <Ashes to Ashes>는 당시 영국의 뉴로맨틱 운동과 관계가 깊다. 뉴로맨틱은 펑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회의 긍정적인 부분을 찾고자 했으며 자극과 쾌락을 추구했다. 1970년대 후반 영국 경제가 악화하면서 대부분 젊은이들이 펑크에 열광한 게 사실이지만 뉴로맨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뉴로맨틱 음악은 글램 록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어찌 보면 보위는 뉴로맨틱에서 상징적인 존재다. 이때부터 보위도 런던 뉴로맨틱 클럽 블리츠를 방문하는 등 뉴로맨틱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Ashes to Ashes>는 뉴로맨틱의 상징적인 노래가 됐다. 

  보위는 이어 디스코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디스코도 뉴로맨틱과 비슷한 개념으로 복잡한 사회문제 대신 춤추고 노는 것에 중점을 둔 음악이다. 일각에서는 디스코를 의식 없는 음악이라고 비판했지만 복잡한 미국 사회에서 탈출구를 제공한 음악은 단연 디스코였다. 보위가 1983년 발매한 디스코 앨범 《Let's Dance》는 디스코 열풍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10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등 상업적으로 최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디스코 음악이 대체로 그렇듯 상업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1980년대 초반은 이미 디스코 열풍 막바지였기에 보위의 디스코도 반짝 인기를 누렸을 뿐이었다. 댄스 가수의 최고봉 마이클 잭슨까지 등장하면서 보위의 존재감은 점점 약해졌다. 

  이 시기 보위를 살펴보면 그저 춤추고 노는 한 음악가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당시 인종차별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 흑인 인권과 동서양 화합에 힘썼다. 보위는 1983년 『MTV』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몇 달 동안 『MTV』를 봤는데 튼튼한 기업이었고 좋은 점도 많이 있다”면서도 “소수의 흑인 음악가만 방송해주는 사실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고 말했다. 인터뷰의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MTV』와의 인터뷰에서 『MTV』를 비판했다는 점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인터뷰는 2010년대 후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벌어지면서 재조명됐다. 

  음악적으로는 1983년 싱글 <China Girl>을 통해 아시아인들이 받는 차별을 표현했다. <China Girl> 뮤직비디오에는 제복을 입은 서양인이 동양 여자의 머리를 잡는 일종의 백인우월주의를 보여줬다. 아이러니하게도 <China Girl> 뮤직비디오는 보위가 비판한 『MTV』로부터 최고의 남성 비디오상을 받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항의 대중음악가] 데이비드 보위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