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부터 헤비메탈이 대중음악 주류 장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헤비메탈의 기원에 대해서는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비틀즈의 <Helter Skelter>나 더 후의 <My Generation>을 최초의 헤비메탈 곡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지미 핸드릭스나 크림이 보여준 시끄러운 음악을 헤비메탈로 정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초창기 헤비메탈 전문 밴드를 꼽으라면 대부분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블랙 사바스를 선택한다.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블랙 사바스는 레드 제플린이나 딥 퍼플에 비해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경향이 강하다. 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 로버트 플랜트나 딥 퍼플의 리치 블랙모어는 이미 1960년대부터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었다. 반면 블랙 사바스 기타리스트 토니 아이오미는 앞의 두 사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명성이 낮은 편이었다. 또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한 레드 제플린이나 딥 퍼플과 달리 블랙 사바스는 1970년에야 첫 앨범 《Black Sabbath》를 발매하는 등 후발주자였다. 특히 레드 제플린은 1969년 발매한 《Led Zeppelin II》가 영국 차트 1위, 빌보드 차트 1위를 석권하는 등 이미 절정의 인기를 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블랙 사바스가 저들과 비슷한 급으로 대우받는 배경에는 블랙 사바스 특유의 기타 리프와 단순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 그리고 보컬 오지 오스본의 갖가지 기행 덕분이었다.
오스본은 1948년 영국 버밍엄 아스톤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존 마이클 오스본이지만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이 ‘오지’라는 별명을 붙여줬고, 오스본도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오지라는 이름을 평생 쓰게 된다. 오스본은 어렸을 적 비틀즈의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했고, 이미 10대 초반부터 비틀즈 같은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심을 굳힌 오스본은 15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건설 현장에서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음악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1967년 오스본은 레어 브리드라는 밴드에 보컬로 합류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밴드는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오스본은 레어 브리드에서 만난 베이시스트 기저 버틀러와 폴카 툴크라는 밴드를 조직했고, 새로운 멤버로 기타리스트 토니 아이오미, 드러머 빌 워드를 영입했다. 마침 이들도 활동 중인 밴드가 해체돼 할 일이 없었기에 오스본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라인업 구성 완료 후 밴드 이름을 어스로 변경했고, 동명의 다른 밴드가 있었던 탓에 블랙 사바스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블랙 사바스는 1963년 개봉한 동명의 공포 영화 『Black Sabbath』에서 따온 것으로 이름을 통해 무서운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클럽 공연을 전전하던 블랙 사바스는 필립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1970년 2월 첫 앨범 《Black Sabbath》를 발매했다. 데뷔작임에도 영국 차트 8위, 빌보드 차트 23위에 오르며 성공적인 성적을 거뒀다. 『Allmusic』은 《Black Sabbath》에 대해 “우리가 아는 헤비메탈의 탄생”이라고 극찬하는 등 시대가 지난 후에도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첫 앨범이 성공을 거두자 블랙 사바스는 곧바로 차기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Black Sabbath》가 발매된 지 불과 7개월 후 블랙 사바스는 헤비메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앨범 《Paranoid》를 세상에 내놓았다. 싱글로 나온 <Paranoid>는 차트 4위를 기록했고, 앨범 《Paranoid》는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단숨에 블랙 사바스를 스타로 만들었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오스본은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Paranoid》를 작업할 당시 블랙 사바스는 앨범 제목을 《War Pigs》라고 지으려 했다. 앨범에 수록된 곡 <War Pigs>는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는 음악으로 당시 시대상과도 연관이 깊다. 레코드사의 반대로 앨범 제목은 《Paranoid》로 결정됐지만 <War Pigs>를 통해 당시 오스본이 바라본 세상을 엿볼 수 있다.
‘정치인들은 스스로 몸을 숨기지. 그들은 전쟁을 시작했을 뿐인데. 왜 저들이 싸우러 나가야 하지? 그들은 그 역할을 가난한 자들에게 맡기지.’ - <War Pigs>
《Paranoid》 발매 후 미국에서도 블랙 사바스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 젊은이들이 갈망했던 베트남 전쟁 반대를 외친 음악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1971년 1월, 블랙 사바스는 첫 미국 공연을 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혔고, 《Paranoid》도 빌보드 차트 12위까지 올랐다. 후속 앨범 《Master of Reality》 《Vol. 4》 《Sabbath Bloody Sabbath》 등도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며 블랙 사바스는 레드 제플린 부럽지 않은 월드스타에 등극했다.
하지만 블랙 사바스의 간판 오스본은 망가지고 있었다. 그는 1971년 처음 약물을 접한 후 약물을 찾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물론 그 당시 음악가들의 약물 복용은 일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오스본은 그 차원이 달랐다. 애초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오스본은 약물로 정신력마저 약해져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다른 멤버들이 곡을 써와도 오스본은 그 곡을 제대로 부르지 않았고, 어쩔 때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1977년 아버지 잭 오스본이 사망하면서 오스본의 정신 건강은 더욱 황폐해졌다. 블랙 사바스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온 것이다.
1977년 말, 오스본은 재충전을 위해 잠시 블랙 사바스 활동을 중단했다. 당시 차기 앨범 녹음을 시작하려던 블랙 사바스는 플리트우드 맥 보컬 출신인 데이브 워커를 영입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려 했을 뿐 블랙 사바스와 결별할 생각이 없었던 오스본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블랙 사바스는 워커 보컬 체제로 방송에 출연하는 등 새출발을 하려 했지만 오스본이 복귀를 희망하자 이내 오스본 보컬 체제로 다시 전환해 앨범 《Never Say Die!》를 발매했다.
그러나 한번 틀어진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고, 앨범 작업 중에도 멤버들 간 크고 작은 다툼이 이어졌다. 1978년 『Never Say Die!』 투어를 진행하는 등 활동은 이어졌지만 예전 같은 팀워크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인지 《Never Say Die!》는 영국 차트 12위, 빌보드 차트 69위라는 상대적으로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때까지 블랙 사바스의 앨범 중 영국 차트 10위권 안에 진입하지 못한 앨범은 《Technical Ecstasy》뿐이었고, 블랙 사바스의 앨범이 빌보드 차트 60위 안에 들지 못한 것도 처음이었다. 결국 오스본은 《Never Say Die!》를 마지막으로 블랙 사바스를 탈퇴했고, 블랙 사바스는 레인보우 보컬 출신인 로니 제임스 디오를 새로운 보컬로 영입했다. 디오 영입 후인 1980년, 블랙 사바스는 앨범 《Heaven and Hell》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9위, 빌보드 차트 28위를 기록하면서 예전 영광을 약간이나마 회복했다.
한편 탈퇴한 오스본은 자신만의 철학과 음악성을 담은 앨범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블랙 사바스에서 탈퇴한 상황에서 그를 받쳐줄 연주가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이때 오스본이 모집한 멤버는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 베이시스트 밥 데이슬리, 드러머 리 커슬레이크, 3명으로 당시로서는 모두 무명의 연주가들이었다. 이렇게 1980년 발매된 오스본의 앨범 《Blizzard of Ozz》는 영국 차트 7위, 빌보드 차트 21위라는 성적을 거두면서 근소하나마 《Heaven and Hell》을 앞섰다.
하지만 팬들이 《Blizzard of Ozz》에서 주목한 건 차트 성적이 아닌 가사 내용이었다. 오스본은 <Goodbye to Romance>에서 “내가 말할 게. 친구들이여 안녕. 과거도 안녕. 내 생각에 우리는 끝에 가서야 만날 거야”라며 블랙 사바스와의 작별을 고했다. 또 <Crazy Train>을 통해 블랙 사바스 시절 제대로 하지 못한 반전운동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 끝났지만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한참 진행 중이었다.
‘우리는 냉전의 후계자들이 되고 있어. 물려받은 문제들 때문에 나는 정신적으로 마비됐어. 미쳤어. 난 이제 참을 수 없어. 나는 불공평한 무언가와 살고 있어. 심리적 상처는 치료되지 않아. 누구를 그리고 뭐를 비난해야하지? 나는 미친 기차 위에서 탈선했어.’ - <Crazy Train>
《Blizzard of Ozz》에서 가장 문제가 된 곡은 <Suicide Solution>이다. 이 곡은 청소년의 자살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실제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청소년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존 오코너 추기경은 <Suicide Solution>에 대해 “폭력적인 가사의 전형적인 노래”라고 비판했다. 1985년 11월에는 한 학생이 <Suicide Solution>을 듣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며 학생의 부모가 오스본을 고소하기도 했다. 오스본이 법적으로는 승소했지만 여기저기서 나오는 비판을 피하지는 못했다. 훗날 오스본은 <Suicide Solution>이 1980년 사망한 AC/DC의 보컬 본 스코트를 위한 노래라고 회고했다.
오스본이 비판을 받은 배경에는 그가 보여준 갖가지 기행도 한몫했다. 1981년 어느 날, 오스본은 평화 운동의 일환으로 비둘기를 하늘로 날려 보내는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늘 그랬듯 마약에 찌들어있었던 오스본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정신을 아예 잃었는지 그 자리에서 비둘기의 목을 물어뜯는 기행을 선보이고야 만다. 이 장면은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면서 오스본을 유명하게 만들었지만 당연하게도 논란이 된 행동이었다.
이듬해에는 비둘기에 이어 박쥐까지 물어뜯었다. 1982년 1월, 오스본은 아이오와주 데스 모이네스에 있는 한 클럽의 무대에 올랐다. 공연이 무르익어갈 무렵 한 관객이 무대 위로 박쥐를 집어던졌고 오스본은 이를 장난감 박쥐로 착각했다. 퍼포먼스 차원에서 박쥐의 머리를 물자 박쥐는 날개를 펄럭이며 고통스러워했고, 오스본도 이에 당황했지만 이미 박쥐의 목은 부러진 후였다. 시간이 흘러 2019년 1월, 박쥐 사건 37주년을 기념해(?) 목 분리가 가능한 박쥐 장난감이 출시되기도 했다. 박쥐 장난감 출시 소식을 들은 오스본은 트위터를 통해 “오늘은 내가 그 빌어먹을 박쥐의 머리를 물어뜯은 지 37주년이 되는 날이다”라며 “목 분리가 가능한 이 기념적인 고급 장난감으로 축하해 달라”고 전했다.
온갖 비정상적인 일을 벌이면서 멘탈이 뛰어났을 것 같은 오스본이었지만 그에게도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1982년 3월, 미국 투어를 다니던 중 오스본의 기타리스트 랜디 로즈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로즈로 말할 것 같으면 클래식 기타를 섭렵한 인물로 오스본의 음악적 스케일을 한 단계 키운 인물이다. 당시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네오클래식메탈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람도 바로 로즈였다. 네오클래식메탈은 훗날 잉베이 맘스틴에 의해 전성기를 맡게 된다. 로즈가 없었다면 오스본도 블랙 사바스과 별 다를 게 없는 음악을 했을 가능성이 높고, 《Blizzard of Ozz》의 성공도 힘들었을 것이다. 오스본도 로즈를 단순 동료가 아닌 자신의 모든 걸 공유하는 절친으로 대우했다. 오스본은 1987년 로즈를 추모하는 앨범 《Tribute》를 발매하는 등 로즈 사후에도 그를 잊지 않았다.
로즈의 사망 후인 1983년, 오스본은 새로운 기타리스트 제이크 E. 리를 영입해 앨범 《Bark at the Moon》을 발매했다. 《Bark at the Moon》은 영국 차트 24위, 빌보드 차트 19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이번에도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캐나다에서 한 청년이 《Bark at the Moon》을 듣고 한 여성과 그의 두 아이를 살해한 것이다. 오스본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Commit Suicide>에 이어 언론의 집중 포화를 당해야만 했다.
오스본은 아무리 봐도 비정상적인 인물이었지만 평화에 대한 신념은 늘 품고 있었다.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른 1986년, 그는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앨범 《The Ultimate Sin》을 발매했다. 음악적으로도 제이크 E. 리의 무거운 연주가 로즈 시절과는 또 다른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제이크 E. 리는 오스본과 음악적 견해 차이로 불화를 겪었고 결국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오스본과 결별했다.
‘우리들 중 아무도 전쟁을 믿지 않는다면 무기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말해줄 수 있니. 다들 내 말을 들어봐. 버튼을 누르면 달아날 곳이 없어.’ - <Killer of Giants>
‘불길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 걸까. 시간은 실로 엄청난 공격과 고통으로 보여. 시간이 전쟁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것이라면 말이야.’ - <Thank God for the Bomb>
1989년 8월, 오스본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공연이 열렸다. 바로 소련에서 열린 모스크바 음악 평화 축제다. 당시 동유럽 국가들은 하나 둘 붕괴하고 있었고, 독일 베를린 장벽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냉전이 끝나가는 분위기에 맞게 미국과 소련의 유명 헤비메탈 밴드들이 한 곳에 모여 화합을 하자는 취지의 공연이었다. 축제에 참여한 미국 밴드는 오스본을 비롯해 본 조비, 스키드 로우, 신데렐라, 머틀리 크루 등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밴드들이었다. 소련 측에서는 고르키 파크, 뉘앙스, 브리가다 S 등 인기 밴드들이 참여했고, 서독의 스콜피온즈도 축제 무대에 올랐다.
의욕이 앞선 오스본은 자신을 공연 뒤쪽 순서에 배치해달라고 요구했다. 보통 음악 축제에서 유명한 음악가일수록 뒤에 나오고 마지막은 헤드라이너라고 해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가가 나오기 마련이다. 당시 최정상급 인기를 누렸던 본 조비가 헤드라이너를 맡는 것에는 이의가 없었지만 오스본 입장에서 머틀리 크루보다 순서가 앞이라는 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는 공연을 불과 한 시간 앞두고 순서를 조절하지 않으면 공연을 하지 않겠다고 주최 측을 협박했다.
머틀리 크루 멤버들은 마약은 기본이고 음주운전에 가정폭력 등 오스본 못지않은 문제아들이었다. 오스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정도로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머틀리 크루 매니저 독 맥기의 결정으로 결국 머틀리 크루가 오스본보다 먼저 공연했다. 잡음이 있기는 했지만 오스본과 머틀리 크루는 이전에 같이 공연을 하는 등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다행히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다만 이 일을 계기로 맥기는 머틀리 크루 매니저에서 해고됐다.
우여곡절 끝에 축제가 진행됐지만 오스본은 이날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다. 다른 음악가와 달리 오스본이 무대에 올라가자 수천 명의 관객이 온갖 물건을 던져대며 그야말로 광란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스키드 로우의 베이시스트 레이첼 볼란은 2017년 9월 『Rolling Stone』과의 인터뷰에서 “관객들은 밴드가 누구 건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 축제를 즐겼다. 하지만 오스본은 예외였다”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음악 평화 축제는 소련이 가진 첫 로큰롤 자유의 경험이다. (…) 축제는 젊은 소련 팬들에게 무엇이 인생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줬다. 미국인, 영국인, 독일인이 소련에서 첫 공연을 했다는 경험도 선사했다.’ - 2017년 9월 22일 『Rolling Stone』
오스본은 1996년부터 매년 오즈페스트라는 축제를 열기 시작했다. 한편 이 시기 블랙 사바스는 최악의 실적을 거두고 있었다. 1994년 발매한 앨범 《Cross Purposes》는 빌보드 차트 122위라는 굴욕적인 성적을 거뒀고, 1995년 발매한 《Forbidden》은 아예 순위에 오르지도 못했다. 과거 오스본을 내쫓은 블랙 사바스였지만 이제는 둘의 입장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오스본도 블랙 사바스에 마음이 없지 않았다. 특히 버틀러는 오스본이 무명일 때부터 함께한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맞으면서 1997년 오스본, 아이오미, 버틀러가 뭉쳐 원년 블랙 사바스 멤버로 돌아왔다. 다만 드러머 워드는 개인 사정으로 블랙 사바스를 탈퇴한 상태였고, 과거 오스본의 드러머였던 마이크 보딘이 새로운 블랙 사바스 드러머로 합류했다.
오스본의 블랙 사바스 재합류 후 첫 무대는 1997년 오즈페스트였다. 1998년에는 라이브 앨범 《Reunion》을 발매했지만 오스본이 함께한 블랙 사바스의 정규 앨범은 16년 후인 2013년에야 《13》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됐다. 《13》은 각종 차트를 석권했고, 빌보드 차트 1위까지 오르는 등 역대급 성적을 거뒀다. 실제 블랙 사바스 정규 앨범 중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건 《13》이 유일하다.
아쉽게도 블랙 사바스는 2017년 투어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블랙 사바스는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블랙 사바스 1968~2017’이라고 게시했다. 아이오미의 건강 상태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지지만 사실 오스본도 솔로 활동과 블랙 사바스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어느 한 쪽에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오스본은 2020년에도 앨범 《Ordinary Man》을 발매해 빌보드 차트 3위에 오르는 등 70대에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대중에게 알려진 오스본의 이미지는 기행 그 자체지만 그 기행은 의외의 좋은 효과를 만들었다. 소련 국민들이 오스본에 열광한 이유 역시 그의 기행 때문이었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오스본은 미국과 소련 국민이 동시에 열광한 몇 안 되는 음악가였다. 조금 과장해서 오스본이 평화를 외치지 않았다면 소련 붕괴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차가운 냉전 시대에 미국인이 소련 국민들을 열광시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