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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Sep 13. 2022

'흑인 운동을 넘어 세계 평화까지' 스티비 원더

   1963년 8월 빌보드 차트에서 특이한 기록이 나타났다. 빌보드 싱글 차트 최초로 라이브 버전으로 발매된 싱글 <Fingertips>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Fingertips>를 부른 주인공은 당시 만 13세에 불과했던 소년으로 역대 최연소 빌보드 차트 1위 기록까지 갈아치웠다. 그 주인공은 바로 모타운의 상징으로 불리는 스티비 원더였다.  

   원더는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천재성을 인정받아 만 11세라는 어린 나이에 모타운과 계약을 맺었다. 누구나 그렇듯 원더도 처음에는 다른 가수들의 공연을 따라다니며 한 두곡 부르는 것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알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얼마가지 않아 슈프림즈 등과 함께 모타운을 대표하는 음악가가 됐다.  

   원더는 아버지의 학대와 신체적인 장애로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다행히 어머니 룰라 매 하더웨이가 원더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줬지만 그 시대 흑인의 삶은 다들 평범하지 않았다. 원더가 나름 음악가로서 이름을 알린 후에도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종의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   

 
 

  1960년대 초반 모타운 음악가들은 『Motortown Revue』라는 이름의 순회공연을 다녔다. 모타운의 음악가들은 대부분 흑인이었고, 이들은 음악과 공연을 통해 인종 간 화합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현실의 벽은 냉혹했다. 숙박시설은 물론이고 식당,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백인 전용’ 간판을 마주해야했다. 그들은 투어 과정에서 백인과 수도 없이 갈등을 겪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백인 전용 구역에 주차를 했다는 이유로 총까지 꺼내들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경찰의 제지로 큰 사건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원더에게는 충격적인 일들이었다.  

   원더는 음악 활동 초창기 밥 딜런의 저항정신을 동경했다. 1966년 원더가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를 리메이크해 부르기도 했다. 기존의 노래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 속에서 날아가고 있어”를 “내가 말해주지.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 속에서 날아가고 있어”라는 식으로 개사해 부른 것이다. 원더는 같은 해 발매된 앨범 《Down to Earth》에서도 딜런의 정신을 이어 받아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다뤘다. 이전까지 모타운은 사회문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Down to Earth》는 슬럼가의 모습을 그대로 앨범 커버에 담으면서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길고 외로운 계곡처럼 나는 꿈을 향해 달리고 있어. 움직여. 움직여. 나무 위 가지처럼 나는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 움직여. 움직여.’ - <A Place in the Sun>  

 
 

   이 시기 원더는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사회운동가들에게도 큰 관심을 보였다. 1966년 1월, 킹 목사는 시카고에서 열린 남부 기독교지도자회의에 참석했을 때 원더는 그를 만나기 위해 회의장까지 찾아가 밖에서 기다렸다. 킹 목사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원더는 반갑게 다가가 인사했고, 킹 목사 역시 원더의 노래를 칭찬했다. 하지만 킹 목사는 1968년 4월 암살당했고, 두 달 후인 1968년 6월에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했다. 로버트 케네디 역시 원더가 존경하는 인물 중 한명이었다. 당연하게도 원더 역시 혼란에 빠졌다.  

   1969년에는 리처드 닉슨이 새로운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공화당 출신의 닉슨은 원더와 반대 성향의 인물이었지만 닉슨 취임 초창기에는 둘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9년 5월, 원더는 대통령 산하 장애인고용위원회의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닉슨 대통령은 원더와 그의 어머니 하더웨이를 백악관으로 초대해 악수를 나눴고, 이날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원더는 본인의 사상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는 1971년 5월 그를 키워준 모타운과의 계약을 해지하게 된다. 모타운에서는 그가 원하는 사회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모타운의 사장 베리 고디는 저항정신을 다룬 음악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실제 1960년대 후반부터 원더가 노래한 흑인 빈민가의 삶과 같은 곡들은 라디오 방송 선곡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원더는 자신이 추구하는 사상을 쫓았고 자연스럽게 고디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마빈 게이와 유사한 길을 걸었던 셈이다.  

  모타운이 아니었으면 지금 우리가 아는 원더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11세 시각장애인이었던 원더를 데뷔시킨 것 자체가 모타운 입장에서는 모험이었다. 원더와 고디는 개인적인 견해에 차이가 있었을 뿐 악의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원더 입장에서 모타운만한 소속사도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 원더는 모타운과 계약을 해지했지만 인연마저 끊지는 않았다. 대신 앨범 제작에 있어서 모든 권한을 자신이 가진다는 조건으로 재계약을 요구했다. 고디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조건이었지만 결국 원더의 뜻을 들어줬다.  

 
 

   자유의 몸(?)이 된 원더는 1971년 말 존 싱클레어 석방을 위한 공연에 참여하게 된다. 싱클레어는 인종차별 반대를 모토로 하는 ‘화이트팬서당’ 설립을 주도한 인물이다. 화이트팬서당은 미국 내 흑인 급진단체 ‘블랙팬서’를 돕는 백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1년 후인 1969년, 싱클레어는 마리화나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훗날 밝혀지기로는 존 싱클레어가 두 갑의 마리화나를 밀매했는데 운 없게도 구입한 사람은 마약 담당 위장 경찰관이었다.  

   마리화나 밀매가 올바른 행동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마리화나 두 개를 팔았다는 이유로 징역 10년형은 과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이에 1971년 12월, 미시건대학교 크라이슬러 아레나에서는 싱클레어 석방을 위한 공연 『Ten for Two』가 열렸다. 싱클레어를 따르는 사람들이 주도한 공연으로 이들은 투옥 배후에 닉슨 행정부가 있다고 주장했다. 원더는 『Ten for Two』에 흔쾌히 참여했고, 원더 외에도 존 레논, 데이비드 필, 필 옥스 등 유명 음악가들이 참여했다. 이 덕분인지 공연이 있은 지 얼마 후 싱클레어는 풀려났다.  

   1972년 3월에는 원더 주도로 만들어진 첫 앨범 《Music of My Mind》가 발매됐다. 이 시기 원더는 톤토즈 익스팬딩 헤드 밴드의 앨범 《Zero Time》을 듣고 신디사이저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원더는 《Music of My Mind》 녹음 과정에서 신디사이저를 적극 반영했고, 이는 기존 모타운 스타일의 음악과 다른 원더만의 독창적인 음악이었다. 원더가 지휘하는 첫 앨범이었기에 우려도 적지 않았지만 빌보드 차트 21위에 오르면서 상업적으로도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다만 비슷한 시기 발매된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이 빌보드 차트 6위에 올랐고, 싱글 <What's Going On>은 2위까지 차지해 아무래도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또 음악성에만 집중했는지 이 앨범에서 원더가 열망했던 저항정신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원더가 그해 10월 발매한 《Talking Book》은 상업적 성과를 거둔 정도가 아니라 차트를 휩쓸다시피 했다. 《Talking Book》은 빌보드 3위에 올랐고, 앨범에 수록된 곡 <Superstition>와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는 빌보드 1위에 오르는 대성공을 거뒀다. 앨범 녹음 당시 원더는 아내 시리타 라이트와 막 이혼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앨범의 수록된 곡은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였다. 원더가 모타운과 재계약을 맺으면서 추구했던 사회성 짙은 음악은 이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여러 흑인들이 원더에게 실망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다.  

   원더가 본격적인 사회적 가수로 거듭난 것은 1973년 8월 3일 발매한 앨범 《Innervisions》에서 부터다. 그는 곡 <Living for the City>에서 인종 문제를, <Too High>에서는 마약 문제를 다뤘다. <He's Misstra Know-It-All>에서는 아예 닉슨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마침 당시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곤혹을 치루고 있었다.  

 
 

  ‘그는 계획을 가진 사람이야. 그의 손에는 위조지폐가 있어. 그는 뭐든지 아는 사람이야. 열심히 놀고 빠르게 말하고 꼴등이 되지 않도록 하지. 그는 뭐든지 아는 사람이야. 웃으면서 거래하지. 항상 그의 거짓말이 많다는 걸 알지.’ - <He's Misstra Know-It-All>  

 
 

  《Innervisions》 발매 3일 후인 1973년 8월 6일, 원더는 큰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날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린빌에서의 공연을 마친 후 다른 공연을 위해 노스캐롤라이나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운전을 맡은 원더의 친구 존 해리스는 고속도로 위에서 한 트럭을 추월하려 했다. 그 때 트럭에 실린 통나무가 별안간 그들 차 위에 떨어지면서 앞유리를 깨버렸다. 맹인인 원더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고, 큰 부상을 입어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Innervisions》은 인기를 얻었지만 원더는 안타깝게도 남은 1973년을 치료하는데 보내야만 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1974년 3월 《Innervisions》은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고, 원더는 무려 그래미상 5관왕에 올랐다.  

   이후 원더는 발매하는 앨범마다 모조리 차트 상위권을 석권하며 시상식 단골손님으로 등극했다. 거물이 된 그는 과거의 꿈꿔왔던 일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일이 그의 영웅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일을 만든 것이었다. 1970년대 후반 노동단체를 중심으로 킹 목사 탄생일을 휴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현실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이에 킹 목사 지지자들은 휴일 지정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고, 원더는 1980년 곡 <Happy Birthday>를 발표해 캠페인에 동참했다. 당연히 킹 목사에 관한 노래로 발표 후 킹 목사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높아졌다. 1986년 마침내 ‘마틴 루터 킹 데이’가 지정돼 1월 셋째 주 월요일은 미국 공휴일이 됐다.  


  ‘좋은 일 하다가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인정을 못 받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존재하지 않기에. 꿈이 그처럼 깨끗해서 보이지 않기에. 그게 환상이 되어가고 있어요. 우리는 모든 걸 알아요. 그는 평화를 위해 잠깐 서있었고 우리 심장은 노래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마틴 루터 킹.’ - <Happy Birthday>  

 
 

   1980년대 원더는 다른 가수들과의 협업을 즐겼다. 음악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동시에 이슈를 만드는 방식으로 그가 하는 캠페인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대표적인 예로 1982년, 원더는 자메이카 레게 선스플래시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레게의 거장 밥 말리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원더는 레게 음악가 서드 월드 그리고 밥 말리의 부인 리타 말리와 함께 연주했다. 공연이 끝난 후 원더는 서드 월드에게 곡을 써줬고, 그렇게 <You're Playing Us Much Too Close>라는 곡이 탄생했다.  

   같은해 원더는 폴 매카트니와 듀엣으로 <Ebony and Ivory>를 불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인종에 대한 노래였다. 이 곡은 사회적 메시지를 주는 노래임과 동시에 상업적으로도 대히트를 쳐 당당히 빌보드 1위를 차지했다. 지금도 매카트니의 베스트 앨범에 항상 실리는 노래이기도 하다. 1984년 원더는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했는데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넬슨 만델라를 언급했다. 때문에 당시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정책)를 시행 중이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Ebony and Ivory>가 한동안 금지곡으로 묶였다.  

   이후 원더와 남아공은 한동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원더는 그가 1985년 발표한 앨범 《In Square Circle》 수록곡 <It's Long>에서 “노예 제도가 잘못된 것처럼 아파르트헤이트도 잘못됐다”고 남아공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원더가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것이야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이렇게까지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진 것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언론들도 원더를 주목했고 세계적으로 반항을 일으켜 UN 아파르트헤이트 특별 위원회의 표창까지 받았다. 여담으로 《In Square Circle》에는 개그콘서트 엔딩 음악으로 유명한 <Part-Time Lover>도 수록돼있다.  

 
 

   1984년 이후에도 원더와 만델라의 관계는 이어진다. 1988년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는 만델라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공연이 열렸다. 당시 투옥 중이었던 만델라의 석방을 촉구하는 자선 공연이었다. 이날 공연에는 원더를 비롯해 에릭 클랩톤, 비지스, 휘트니 휴스턴 등 월드스타들이 참여했다.    

   지금 생각하면 해프닝일 수 있겠지만 원더는 어쩌면 당시 공연을 흑역사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이날 원더는 신디사이저에 들어갈 디스크를 잃어버렸고, 무대 위에 올라가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자 트레이시 채프먼이 올라가 원더 대신 두 곡을 불렀다. 채프먼의 공연이 끝난 후에도 디스크는 찾지 못했고, 결국 공연 막판에 다른 밴드의 장비를 써야만 했다. 그럼에도 이날 원더가 부른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는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기에 충분한 공연이기는 했다.  

   1990년 당시 남아공 대통령이었던 클레르크는 여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만델라를 석방했다. 이때 원더는 <Keep Our Love Alive>를 발표해 만델라를 축하했다. 만델라는 1994년 남아공 대통령에 취임했고 아파르트헤이트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6년 원더는 남아공 프리테리아로 초대받아 만델라를 만났고, 이후로도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2000년대 이후 원더는 음악보다 사회 활동과 관련한 뉴스를 더 많이 등장했다. 원더 개인적으로도 1995년 《Conversation Peace》와 2005년 《A Time to Love》을 마지막으로 새로운 앨범을 발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원더는 평화와 차별 반대 등의 캠페인이 벌어지면 항상 1순위로 이름을 올렸다. 또 닥터 드레, 스눕 도기 독 등 힙합 음악가들과도 협업하는 등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흑인 인권운동에 누구보다 열성을 쏟았던 원더는 버락 오바마의 열성적인 팬이기도 했다. 오바마는 2007년 미국 대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아직은 파워가 강하지 않은 젊은 정치인이었다. 2007년 9월 미국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오바마를 위한 기금 마련 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원더를 비롯해 배우 윌 스미스, 제이미 폭스 등이 참여해 하루 동안 오바마를 위한 성금 300만 달러를 모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원더는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초대가수로 불려나가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원더는 당시 “오바마는 존 F.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을 섞어놓은 것과 같다. 그런 그가 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원더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가 가진 오바마에 대한 기대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원더는 오바마에게 바치는 곡 <All About the Love Again>까지 발표하는 등 열렬한 지지자로 활동했다.  

   그의 기대대로 2009년 미국은 첫 흑인 대통령을 배출했다. 오바마 역시 원더의 팬으로 2009년 원더가 거슈인 상을 수상할 때 오바마가 직접 참석해 원더에게 상패를 건넸다. 2014년에도 원더는 ‘자유의 메달’을 수상했다. 자유의 메달은 국가 안보나 세계 평화, 문화분야에 뚜렷한 공헌을 남긴 미국인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원더는 2009년 UN 홍보대사로 임명됐다. 세상의 차별에 기죽지 않고 목소리를 낸 원더였기에 홍보대사 임명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UN 사무총장이었던 반기문은 원더에 대해 “우리의 새로운 홍보대사는 수백만 사람들이 존경하고 수백만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원더는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얻었고 아버지는 폭력적이었으며 그가 살던 주변은 최악의 빈민가였다. 어머니 하더웨이의 헌신이 아니었으면 원더가 음악가로 성공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원더 역시 어린 시절 폭력적인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자신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하더웨이를 보며 정신을 바로잡았다. 그 결과 최악의 조건에서 태어난 원더는 최고의 음악가로 성장했다.   

   원더는 성공 후에도 교만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을 경멸했다. 명성을 얻은 후에도 안주하지 않고 각종 차별에 대해 끝없이 메시지를 던졌다. 지금도 원더는 트위터에서 킹 목사를 언급하는 등 인권운동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적지 않은 흑인과 장애인이 원더를 지켜보며 용기를 얻었고, 세계 인권운동가들은 원더와 함께 하기를 원했다. 오늘날 흑인 인권 나아가 세계 평화를 논할 때 원더의 이름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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