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는 그 어떤 기준으로 평가해도 대중음악 역사에서 항상 최고로 꼽히는 음악가다. 『Time』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록 음악가, 『Rolling Stone』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위, 『VH1』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위 등등 각종 여론조사에서 비틀즈의 위상은 압도적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라디오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2001년 투표를 실시해 선정한 20세기 대표 음악가 1위에 비틀즈가 올랐다.
이처럼 화려한 경력을 가진 비틀즈지만 최고의 자리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비틀즈의 역사는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 리버풀에 살던 평범한 고등학생 존 레논은 학교 친구들과 록 밴드를 조직했다. 레논은 어릴 때부터 기타에 관심이 많았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에 동네 밴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하튼 밴드 활동을 하던 레논은 친구의 소개로 폴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을 만났고, 이들과 음악 활동을 같이하기 시작했다. 이후 몇 번의 멤버 교체를 거친 후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 세 명의 기타리스트와 드러머 피트 베스트, 베이시스트 스튜어트 셔트클리프, 5인조 멤버를 구성해 어느 정도 진용을 갖췄다. 독일 함부르크로 공연을 떠나는 등 나름대로 순회공연도 가졌다. 셔트클리프는 그저 레논과의 친분으로 밴드에 가입한 것이지 음악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 안 가 밴드를 탈퇴했고, 베이시스트 자리는 매카트니에게 돌아갔다.
밴드명은 쿼리맨으로 시작해 조니 앤 문독스, 실버 비틀즈 등을 거쳐 1960년부터 비틀즈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비틀즈는 어느덧 리버풀에서 가장 잘나가는 밴드가 됐고, 그들이 주로 공연했던 리버풀 캐번 클럽은 오늘날까지도 유명 관광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1961년 어느날, 리버풀에서 음반 가게를 운영하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비틀즈에게 접근해 매니저 일을 자청했다. 정식 계약을 맺은 엡스타인은 음반사 사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비틀즈 음반 제작을 추진했고, 마침내 팔로폰 레코드와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프로듀서 조지 마틴은 베스트의 드럼 실력을 탐탁치 않아한 탓에 베스트 대신 이전부터 비틀즈 멤버들과 친분이 있었던 링고 스타가 새로운 드러머로 영입됐다.
1962년, 비틀즈의 첫 싱글 <Love Me Do>는 영국 차트 17위를 기록하며 신인 치고는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이어 1963년 첫 앨범 《Please Please Me》는 영국 차트 1위를 거뒀고, 두 번째 앨범 《With the Beatles》 역시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하면서 순식간에 영국 음악계를 정복했다. 비틀즈는 1964년 2월 미국 방송 프로그램 『Ed Sullivan Show』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빌보드 차트 1~5위를 모두 비틀즈 곡으로 채우는 등 미국 시장에서도 압도적인 성공을 거뒀다.
1960년대 비틀즈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공을 거뒀지만 그들의 삶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레논은 아이돌 생활에 염증을 느끼며 변화를 추구했다. 1966년 11월, 레논은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인 예술가 오노 요코의 전시회를 찾았다. 레논은 순식간에 요코에게 빠졌고, 부인 신시아 레논과 이혼한 후 1969년 요코와 재혼했다.
레논은 요코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보통 결혼을 하면 신혼여행을 가기 마련이지만 톱스타인 레논을 기자들이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레논은 달콤한 신혼여행 대신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베드-인’ 시위다.
1969년 3월 25일, 레논과 요코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힐튼호텔 스위트룸 902호에 들어갔다. 그들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호텔 방 안에서 평화를 외쳤다. 각국에서 온 기자들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맞았는데 이는 철저한 레논의 계획이었다. 레논은 ‘레논과 요코가 결혼하다’라는 뉴스 제목보다 ‘레논과 요코가 결혼한 후 평화를 위한 베드-인 시위를 하다’라는 제목을 원했던 것이다.
베드-인 시위는 1969년 5월에도 이어졌다. 당초 레논은 뉴욕에서 시위를 할 계획이었지만 미국이 레논의 입국을 불허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1968년 레논이 대마 소지 혐의로 체포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레논은 바하마로 향했지만 형편없는 호텔 시설에 실망했고, 다시 캐나다 몬트리올로 목적지를 바꿨다.
몬트리올의 베드-인 시위는 암스테르담 때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진행됐다. 1969년 5월 26일, 레논과 요코는 퀸 엘리자베스 호텔 방 4개를 잡고 기자들을 맞이했다. 때로는 전화로 미국 언론사와 접촉하거나 전 세계에 베드-인 시위를 중계하기도 했다. 베드-인 시위 마지막 날인 1969년 6월 1일, 레논은 호텔방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노래 <Give Peace a Chance>를 녹음했다. 레논과 토미 스마더스가 기타를 잡았고, 요코는 탬버린을 흔들었다. 1969년 7월 싱글로 정식 발매된 <Give Peace a Chance>는 영국 싱글 차트 2위, 미국 빌보드 차트 14위에 오르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뒀다.
‘모두들 말하지. 혁명, 진화, 자위, 채찍, 규제, 통합, 명상, UN, 축하. 우리가 말하는 모든 건 평화의 기회를 달라는 뜻이야.’ - <Give Peace a Chance>
레논의 이 파격적인 시위는 한국에서도 이슈가 됐다. 그런데 통신이 발달하기 전이어서 그랬는지 당시 한국 언론은 엉뚱한 방향으로 베드-인 시위를 해석했다. 레논의 팬이라면 하루 종일 웃을 내용이지만 언론의 무책임함이 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원문 그대로 당시 기사를 소개한다.
‘영국 비틀즈 단원 존 레논 군과 그의 일본인 신부 오노 요꼬 양은 26일 침대에 들어가면서 암스텔탐에서 어린이를 잉태하기 위해 잠자리에 7일간 머물겠다고 선언했다.’ - 1969년 3월 26일 『매일경제신문』
‘최근에 결혼한 비틀즈의 존 레논 군과 일본인 신부 오노 요꼬는 해프닝쇼를 벌이기 위해 25일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는데 그들은 기자들과 친구들을 모아놓고 20세기의 가장 노골적인 사랑의 장면을 연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레논 군은 “사랑은 부끄러워할 것이 못되는데 왜 감추지…”라고 말하면서 “쇼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아마 사랑의 분위기 속에 도취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 1969년 3월 27일 『조선일보』
아무튼 베드-인 시위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1969년 12월, 레논과 요코는 베드-인 시위의 마지막으로 ‘전쟁은 끝났어요. 당신이 원한다면’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옥외광고를 전 세계 12개 도시에 내걸었다.
레논이 파격적인 행보를 보일 동안 비틀즈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었고, 결국 1970년 4월 해체되고 만다. 비틀즈 해체 후 각 멤버들은 본인의 솔로앨범을 내면서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른 멤버들과 레논의 차이점이라면 그는 음악을 사회운동의 수단으로 사용할 정도로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비틀즈 해체 후 발매된 레논의 첫 솔로 앨범 《Plastic Ono Band》는 그의 사상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레논은 <Love>에서 평화와 인류애의 사랑을 강조했고, <Working Class Hero>에서는 영국의 계급제도를 비판했다. 이밖에 <God>에서는 예수, 부처 등 종교와 히틀러, 케네디 등 정치인을 모조리 부정했다. 이때 레논의 사상은 한마디로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로 정의된다.
레논은 영국인이었지만 1971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와 미국에서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펼쳤다.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이런 레논의 행보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런저런 견제가 이어졌지만 레논은 아랑곳하지 않고 1971년 두 번째 솔로 앨범 《Imagine》을 발매해 보다 직접적으로 미국 정부를 비판했다. <I Don't Wanna Be a Soldier>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군인을 실패자, 목사, 도둑 등에 비유했고, <Gimme Some Truth>는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외곬수로 표현했다. 가사에 등장하는 ‘트리키 디키’는 닉슨 대통령의 별명이다.
‘단정한 머리에 노란 방울이 달린 닉슨의 아들 녀석은 나한테 아첨하는 하버드 아줌마가 될 거야. 희망으로 가득한 주머니와 함께 말이야. 마약할 돈 도박할 돈. 말없이 잘난 척하는 엄마의 맹목적 애국주의자. 나는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아주 지긋지긋해. 내가 원하는 건 진실이야. 진실을 말해줘.’ - <Gimme Some Truth>
《Imagine》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거대한 것이었지만 타이틀 곡 <Imagine>에 묻힌 경향이 없잖아 있다. <Imagine>에는 반전과 평화, 재산 소유 반대 등 여러 복합적인 뜻이 담겨 있다. 문제는 곡이 너무 좋아서 정작 레논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Imagine>이 진보주의자 혹은 평화주의자의 상징적인 노래로 꼽힌다. 9·11 테러 당시 닐 영은 추모의 뜻으로 <Imagine>을 불렀고, 국내에서도 제16대 대통령선거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 광고에 <Imagine>을 삽입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식,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등 스포츠 행사에서도 <Imagine>은 자주 등장한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하면서 <Imagine>에 대한 다른 평가도 나오고 있다. 무소유를 주장한 레논이 사실은 억만장자였다는 점에서 나오는 비판이다. 사실 이는 과거에도 종종 나왔던 비판으로 펑크 음악가 엘비스 코스텔로는 1991년 싱글 <The Other Side of Summer>에서 “소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던 사람은 백만장자가 아니었나?”라고 일갈했다. 멀리 갈 것 없이 국내에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부동산으로 돈 벌 수 없는 세상을 원한다는 유시민 작가는 수년 전 강남으로 이사했고, 굳이 개천의 용이 될 필요가 없는 세상을 원한다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자녀 입시에 보통 사람은 할 수도 없는 편법을 썼던 것이 떠오른다. 조국 전 장관은 과거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자녀의 장학금 수령을 비판했지만 본인 자녀는 장학금을 수령했고, 검사장의 관용차랑 제도를 폐지하자면서 본인은 장관 시절 휴일에 관용차량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어진 레논의 1972년 앨범 《Some Time in New York City》는 그야말로 미국 정부에 대한 도전이었다. 존 싱클레어 석방을 요구하는 <John Sinclair>, 아티카 교도소 폭동 사건을 다룬 <Attica State>와 <Angela> 등은 대놓고 미국의 현실을 꼬집는 곡들이다. 아티카 교도소 폭동 사건이란 정치범들을 중심으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던 죄수들이 교도관들을 인질로 잡고 ‘일주일에 한 번 샤워를 하게 해달라’는 등 28가지 사항을 요구한 사건이다. 넬슨 록펠러 당시 뉴욕 주지사는 협상을 거부하고 진압에 나섰으며 이로 인해 교도관 10명을 포함해 43명이 사망했다.
이밖에 여성 인권을 다룬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 민간인을 상대로 발포해 논란이 된 아일랜드를 다룬 <Sunday Bloody Sunday>와 <The Luck of The Irish>도 주목을 받았다.
레논은 이처럼 정치적인 노래를 부르는 한편 각종 시위대를 찾아 크고 작은 공연을 열었다. 미국 정부는 레논을 위험인물로 분류하며 예의주시했다. 그렇지만 시위 현장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벌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미국 정부는 레논의 비자 갱신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그를 추방하려 했다. 비자 갱신 거부의 직접적인 이유는 레논이 과거 대마를 소지했다가 발각된 전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레논은 항의했지만 미국 정부는 1973년 3월 존에게 60일 내 미국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레논에게 천운이 따랐는지 1973년 5월 워터게이트 청문회가 열리면서 레논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감시망은 느슨해졌다. 워터게이트 사건이란 1972년 재선을 노리던 닉슨 대통령 측이 워싱턴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사건의 여파로 닉슨은 1974년 대통령 자리에서 사임해야만 했다. 후임 미국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 정부 체제인 1975년, 드디어 미국은 레논의 추방 명령을 취소했다.
미국 체류를 희망한 레논이었지만 사실 그는 국가의 개념이 없는 세상을 원했다. 1973년 4월 2일, 레논과 요코는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뉴토피아’라는 신개념 국가를 소개했다. 만우절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레논의 이상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레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개념 국가 뉴토피아의 탄생을 선언합니다. 당신이 뉴토피아에 대해 안다면 이 국가의 시민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뉴토피아에는 땅, 국경, 여권이 없고 사람만 있습니다. 뉴토피아에는 법이 없습니다. 뉴토피아의 모든 사람들은 국가의 대사입니다. 저와 요코는 뉴토피아의 대사로서 UN에 외교관의 권리와 면책특권을 요구할 것입니다”
1975년 10월, 요코는 레논의 아들 숀 레논을 출산했다. 미국 정권 교체, 추방 명령 철회, 아이 출산 등 레논에게 경사가 겹친 셈이었다. 레논은 전업주부를 선언한 것도 이때다. 그는 음악활동과 사회운동을 잠시 중단하면서 집안일에만 몰두했다. 어쩌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숀 레논을 보살폈는지도 모르겠다.
레논은 1975년 《Rock 'n' Roll》 이후 앨범 발매도 하지 않았고, 외부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아 대중들은 레논의 얼굴을 보기 어려워졌다. 그나마 알려진 활동은 링고 스타를 위해 곡 <Cookin' (In the Kitchen of Love)>을 써준 것과 가끔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한 정도다.
하지만 팬들은 레논의 복귀를 요청했고, 레논도 이를 무작정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문제는 오랜 기간 음악을 쉬면서 떨어진 자신감이었다. 1980년 어느 날, 복귀라는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한 레논은 머리도 식힐 겸 버뮤다로 항해 여행을 떠났다. 여행 도중 폭풍우가 불었고, 선원들은 피로와 멀미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요트를 운전할 사람이 없어 레논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고 어떻게 요트 운전에 성공했다. 레논이 뭐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이자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한 순간이었다.
1980년 11월 레논은 오랜 침묵을 깨고 앨범 《Double Fantasy》를 발매했다. 앨범의 주요 테마는 행복한 가정이었다. 젊은 시절 보여줬던 저항정신, 사회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레논은 1970년대 후반부터 일반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삶을 보내기는 했다.
《Double Fantasy》의 첫 곡 <(Just Like) Starting Over>는 경쾌한 종소리로 시작해 첫 솔로 앨범 《Plastic Ono Band》의 첫 곡 <Mother>의 우울한 종소리와 묘한 대비를 이룬다. 레논에게 1970년대 시작이 무거운 투쟁이었다면 1980년대는 상쾌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Double Fantasy》 발매를 앞둔 1980년 9월, 레논은 『Playboy』와의 인터뷰에서 “모두들 마치 인생이 끝난 것처럼 말년에 좋은 것 하나 낸다고 말한다”며 “그러나 나는 40세, 매카트니는 38세로 우리는 상대적으로 젊다. 모두들 비틀즈의 마지막 콘서트, 마지막 앨범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별 일 없으면 40년은 더 살 것이다”라고 말했다. 레논 스스로도 미래를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아쉽게도 레논의 1980년대는 《Double Fantasy》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80년 12월 8일 오후 5시, 레논과 요코는 당시 거주 중이었던 다코타 빌딩을 나와 스튜디오로 향했다. 그때 마크 채프먼이라는 한 청년이 《Double Fantasy》를 들고 다가와 존에게 사인을 요청했고, 레논은 흔쾌히 사인을 해줬다.
그날 일과를 마친 레논은 오후 10시 50분께 다코타 빌딩으로 귀가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낮에 레논의 사인을 받았던 채프먼도 다코타 빌딩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레논과 요코가 리무진에서 내리는 순간 채프먼은 존에게 달려들어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는 레논에게 5발의 총알을 쐈고, 이 중 4발이 레논을 관통했다. 대중음악을 지배한 음악가의 마지막치고는 너무 허무한 것이었다. 레논의 사망을 놓고 미국 정부에 의한 정치적 암살이라는 설이 돌지만 아직까지 확인된 것은 없다.
《Double Fantasy》는 빌보드 차트 1위, 1982년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지만 이미 레논은 사망한 후였다. 1980년 12월 22일 『Time』의 표지는 레논의 얼굴이었고, 표지 제목은 ‘음악이 죽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