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M Sep 16. 2022

'브릿팝 부활을 이끈 반항아' 노엘 갤러거

   1994년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비극적으로 삶을 끝내자 얼터너티브 록으로 대표되던 대중음악계도 혼란에 빠졌다. 펄 잼, R.E.M. 등 얼터너티브 록 음악가가 분전했지만 대표 주자인 코베인의 부재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음악 팬들은 힘이 빠진 얼터너티브 록이 아닌 새로운 음악을 원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등장한 음악이 바로 브릿팝이다.  

   브릿팝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장르다. 브릿팝을 얼터너티브 록의 하위 장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고, 1990년대 중반 영국의 대중음악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뭐가 됐건 코베인의 사망 후 영국을 중심으로 브릿팝이 대중음악 주류로 떠오르면서 일각에서는 비틀즈의 부활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브릿팝은 대체로 기타를 사용한 밝은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우울한 내용도 적지 않고, 때로는 냉소적으로 사회를 비판하곤 한다. 2000년대 들어 펑크를 재해석한 장르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도 브릿팝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브릿팝 음악가 중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그룹으로는 오아시스가 꼽힌다. 오아시스는 노엘 갤러거와 리암 갤러거 형제가 이끄는 밴드로 라이벌 밴드 블러와의 경쟁, 갤러거 형제 간 다툼 등 여러 에피소드를 남겼다. 오아시스는 한편으로 루저를 자처하면서 노동 계급을 대변했다. 당연히 그들은 영국 노동당 지지자였고, 노동당 역시 오아시스와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다.  

 
 

   오아시스의 시작은 198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맨체스터의 불량아였던 갤러거 형제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록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노엘 갤러거는 1989년 인스파이럴 카페츠의 로드매니저로 취직해 본격적으로 대중음악계로 진출했다. 인스파이럴 카페츠는 1983년 맨체스터에서 결성된 밴드로 매드체스터의 대표주자 중 하나로 꼽힌다. 매드체스터는 1980년대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유행한 음악 장르로 록에 신디사이저와 댄스 음악을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리암 갤러거는 1991년 더 레인이라는 밴드에 보컬로 가입해 정식으로 음악가의 길에 들어섰다. 얼마 가지 않아 더 레인은 오아시스로 밴드 이름을 변경했고, 형인 노엘 갤러거가 기타리스트로 합류했다.  

   모든 밴드가 그렇듯 오아시스도 처음에는 클럽 공연을 전전하는 신세였다. 한 성질 했던 갤러거 형제는 공연 기회를 달라면서 클럽 사장들과 싸우는 일도 허다했다. 기회는 의외로 일찍 찾아왔다. 1993년 5월, 오아시스의 공연을 본 앨런 맥기 크레에이션 레코드 대표가 그들에게 계약을 제의한 것이다. 얼마간의 트레이닝과 녹음 작업을 거친 후인 1994년 8월, 오아시스는 크레에이션 레코드를 통해 첫 앨범 《Definitely Maybe》를 발매했다. 이미 1993년부터 오아시스의 입소문이 널리 퍼져있었고, <Supersonic> <Shakermaker> <Live Forever> 등 싱글을 발매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아왔기에 《Definitely Maybe》의 흥행은 예견된 상황이었다.  

   《Definitely Maybe》는 발매 직후 영국 차트 1위에 오르며 단숨에 영국 시장을 장악했다. 『New Musical Express』가 선정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한 것은 덤이다. 어렸을 적 문제아로 악명이 높은 갤러거 형제였지만 의외로 곡들은 밝은 분위기였고, 가사도 낙관적인 내용이 주를 이뤘다. 특히 모든 곡의 작곡을 담당한 노엘 갤러거의 멜로디가 돋보였다.   

 
 

   《Definitely Maybe》의 성공 후 오아시스는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갤러거 형제는 노동 계급 출신으로 소위 잘난 사람들을 싫어했다. 사람이 잘난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갤러거 형제 입장에서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성공한 주제에 남에게 가르치려드는 모습은 꼴불견이었다. 1995년 4월 발매한 싱글 <Some Might Say>는 갤러거 형제의 생각이 잘 표현돼 있다. <Some Might Say>에서 등장하는 ‘누군가’는 소위 금수저들을 지칭하는 단어다. 오아시스는 이미 인기 영국 음악가 반열에 올라섰기에 <Some Might Say>는 손쉽게 영국 차트 1위에 올랐다. 여담으로 오아시스의 당시 드러머 토니 맥캐롤은 <Some Might Say>를 마지막으로 밴드를 탈퇴했다. 탈퇴라기보다는 맥캐롤의 드럼 실력에 불만을 가진 노엘 갤러거가 사실상 쫓아낸 것에 가까웠다. 후임 드러머로는 앨런 화이트가 합류했다.  

 
 

  ‘누군가는 말하지. 천둥이 치면 햇빛이 든다고. 빛날 수 없는 사람에게 가서 그 말을 해보라지. 누군가는 말하지. 우리는 깊이 생각하면 안 된다고. 오늘의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고. 누군가는 말하지. 더 밝은 날이 올 거라고. 나는 기차역에서 비를 맞으며 교육의 필요성을 생각했어. 내가 이렇게 유명해지리라고는 생각 못 했겠지.’ - <Some Might Say>  

 
 

   1995년 10월 발매된 오아시스의 두 번째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는 오아시스, 나아가 브릿팝의 정수를 보여준 앨범이다.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한 것은 물론이고, 빌보드 차트 4위에 오르는 등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앞서 1995년 9월, 오아시스의 라이벌 밴드 블러가 발매한 《The Great Escape》는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빌보드 차트 150위에 머물면서 오아시스에 판정패했다.  

   비평가들도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 일색이었다. 일각에서는 비틀즈의 부활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사실 이 명반 탄생의 배경에는 한국도 간접적이나마 관계가 있다. 앨범 작업을 하던 어느 날 노엘 갤러거는 그의 친구인 한국계 미국인 멜리사 림과 통화를 했는데 이날 노엘 갤러거가 “What's the story”라고 묻자 림이 “Morning glory”라고 답한 것을 듣고 앨범 제목을 정한 것이다. 림과 노엘 갤러거의 구체적인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황상 연인 관계로 보인다.  

   아무튼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발매 후 오아시스의 공연은 항상 만원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1996년 8월 10~11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넵워스 공연으로 첫 날은 13만 5000명, 둘째 날은 14만 5000명의 관객이 오아시스를 찾았다. 물론 넵워스 공연이 오아시스 단독 공연은 아니었고, 프로디지, 케미컬 브라더스 등 인기 음악가들도 참여한 축제였다. 하지만 관객들의 관심은 온통 오아시스에 쏠렸고, 오아시스 역시 최고의 공연을 보여주며 화답했다. 넵워스 공연 예매를 시도한 사람은 250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남부럽지 않은 인기를 얻은 노엘 갤러거는 슬슬 사회현상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7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공연 『Tibetan Freedom Concert』에 참여한 것이다. 이 공연은 중국 지배 아래 있는 티벳의 평화와 독립을 위한 행사였다. 눈에 띄는 점은 오아시스가 아니라 노엘 갤러거 단독으로 공연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노엘 갤러거의 염원과 다르게 티벳은 아직 독립을 못했지만 적어도 세계인들에게 티벳의 현황을 알리는 효과는 있었다. 이 때문인지 오아시스가 2009년 추진한 중국 공연은 중국 당국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중국 당국은 경제적 이유라고 설명했지만 오아시스 측은 티벳을 지지한 전력 때문에 공연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1997년에는 영국 정치 진영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1997년 5월 실시된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659석 중 418석을 차지하며 보수당에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토니 블레어 노동당 대표는 영국 총리로 취임하면서 1979년 이후 18년 만에 노동당이 집권했다.  

   록에 관심이 많았던 블레어 총리는 취임 후 노엘 갤러거를 관저로 초청했다. 당시 노엘 갤러거는 블레어 개인이 아닌 노동당의 대표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확실히 했다. 블레어 총리는 1990년대 후반까지 대중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지만 금융시장 위주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등 보수적인 모습도 보였고, 이라크 전쟁에도 미국 다음가는 규모의 군대를 파병해 노동당 지지자들의 비판을 적지 않게 받기도 했다.   

   게다가 음악가를 선거전에 이용한다는 논란까지 겹치면서 영국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됐다. 펄프의 보컬 자비스 코커는 1998년 4월 26일 『New Musical Express』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노동당에 투표해왔지만 내 위치를 선거에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올바른 일이 아니다. 같은 의미에서 블레어 총리가 브릿팝에 상을 주거나 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블레어 총리에 대한 노엘 갤러거의 지지는 확고한 것이었다. 노엘 갤러거는 시간이 많이 흐른 2019년 4월 29일 『GQ Magazine』 인터뷰에서 “블레어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며 “그렇게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 하는 사람은 블레어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노엘 갤러거의 정치적 행보와 별개로 오아시스는 1997년 8월 세 번째 앨범 《Be Here Now》를 발매했다. 영국 차트 1위를 당연히 차지하면서 오아시스의 인기가 여전함을 보여줬다. 하지만 《Definitely Maybe》나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에 비하면 박한 평가를 받았는데 조화롭지 못한 악기들과 지나치게 긴 음악 시간 때문이었다. 게다가 블러의 《Blur》가 그런지를 도입한 새로운 음악을 시도하며 인기를 끌었고,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Be Here Now》는 이들에 비해 특색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노엘 갤러거도 훗날 《Be Here Now》를 “아무렇게나 만든 음악”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2000년대 들어 힙합 음악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오아시스의 인기도 예전처럼 폭발적이지는 않았다. 오아시스가 2000년 발매한 앨범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나 2002년 발매한 《Heathen Chemistry》가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빌보드 차트에서는 20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판매량도 300만~500만 장 수준으로 1000만 장을 돌파했던 전작들에 비하면 훨씬 떨어졌다. 이대로 오아시스는 잊히나 싶었다.  

   하지만 오아시스의 2005년 앨범 《Don't Believe the Truth》는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영국 차트 1위는 놀라울 것이 없지만 빌보드 차트도 12위까지 올라 간만에 10위권에 진입했고, 판매량도 700만 장으로 늘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전체적인 음반 판매량이 줄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나 괜찮은 성과였다. 싱글로 발매한 <Lyla>와 <The Importance of Being Idle>도 당당히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오아시스 초창기로 돌아가고자 하는 컨셉이 잘 먹힌 셈이다. 한편 앨런 화이트가 2004년 오아시스를 탈퇴하면서 《Don't Believe the Truth》의 드럼은 비틀즈 드러머 링고 스타의 아들 잭 스타키가 맡았다. 스타키는 오아시스의 객원 드러머로만 활동했고, 정식 멤버로는 가입하지 않았다.  

   2008년 앨범 《Dig Out Your Soul》도 영국 차트 1위, 빌보드 차트 5위를 기록하며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 인기에 힘입어 2008년 8월부터 2009년 8월까지 『Dig Out Your Soul Tour』 세계 공연을 진행했고, 당연히 가는 곳 마다 만원이었다. 2009년 4월 1일에는 한국에 방문해 올림픽 공원 체조공연장에서 1만 명 이상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선보였다. 당시 리암 갤러거는 트위터를 통해 “한국, 너희들은 진짜 미친 듯이 놀랍다고 말하고 싶어. 난 너희 나라가 좋아, 내 사람들이여. 영원히 살자”라고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안타깝게도 오아시스의 활동은 『Dig Out Your Soul Tour』가 마지막이었다. 이전부터 있어온 노엘 갤러거와 리암 갤러거 형제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노엘 갤러거가 2009년 8월 오아시스 탈퇴를 선언하면서 오아시스는 해체되고 만다. 노엘 갤러거는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라는 이름으로 개인 밴드를 조직해 활동을 시작했고, 리암 갤러거를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은 비디 아이라는 새로운 밴드를 조직해 활동했다. 노엘 갤러거는 오아시스를 탈퇴한 날 홈페이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발표했다.  

 
 

   “내가 오늘 밤 오아시스를 떠나는 것을 말하게 돼 슬프면서도 안심이 된다. 사람들은 그들 맘대로 말하고 쓰겠지만 나는 더 이상 리암 갤러거랑 일할 수 없다. 오아시스의 파리, 콘스탄츠, 밀라노 공연 표를 예매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미안하다”  

 
 

   노엘 갤러거는 오아시스 탈퇴 후 사회에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0년 5월, 영국 총선 당시 그는 해적당에 투표했다고 밝혔다. 해적당은 2006년 스웨덴에서 최초로 결성된 글로벌 정당으로 2009년 영국 해적당도 창당했다. 2010년에는 벨기에에서 전 세계 해적당을 규합하는 ‘해적당 인터내셔널(PPI)’이 공식 설립됐다. 현재 수십 개 국가에 해적당이 있으며 각국이 연합체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도 2011년 해적당 결성 움직임이 있었지만 현실의 벽에 막혀 창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해적당은 인터넷 자유, 특허제도 폐지, 저작권 제도 개혁 등 인터넷 관련 운동에 적극적이다. 젊은 층의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한때는 대안정당으로 주목받았다. 2016년 아이슬란드 총선에서 국회의원 63석 중 해적당이 10석을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원내 진입에 실패하거나 성공하더라도 소수 정당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노엘 갤러거의 해적당 지지 선언은 해적당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다만 노엘 갤러거는 해적당을 지지했다기 보다는 노동당과 보수당이 모두 망가져 해적당을 뽑은 것이라고 훗날 회고했다.  

   의외로 노엘 갤러거는 정치적으로 강성 행동을 보인 적은 별로 없다. 블레어 총리와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 기본적으로 노동당 지지자였지만 2010년 들어서는 노동당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드러냈다.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이 2010년 영국 총리에 취임했을 때도 노엘 갤러거는 “신경 쓰지 않는다” 정도의 입장만 내비쳤다. 스미스의 기타리스트 조지 마가 “캐머런, 스미스 좋아한다는 소리 하지 마라. 네가 좋아한다는 소리 하는 것 금지야”라고 말한 것과 비교되는 반응이다. 사실 캐머런도 록에 관심이 많았지만 음악가들은 아무래도 노동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음악가의 지원은 거의 받지 못했다.  

   노엘 갤러거가 다시 한 번 화제가 된 것은 2016년 영국이 유럽연합(EU) 탈퇴를 논의한 일명 브렉시트 때다. 영국 내에서 EU 탈퇴를 주장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주요한 이유는 영국이 내야 할 EU 분담금 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다른 유럽국가를 통한 난민 유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려 핑크플로이드의 로저 워터스는 EU 탈퇴를 반대했고,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는 탈퇴를 찬성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대국민 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고, 탈퇴 찬성 51.9%, 반대 48.1%로 EU를 탈퇴하게 됐다. 여러 절차를 거쳐 2021년 1월 영국의 EU 탈퇴가 마무리됐다.  

   당시 노엘 갤러거는 특유의 냉소적인 태도로 영국 정부를 비판했다. 딱히 EU 탈퇴에 대해 찬성이나 반대 의견을 밝힌 것은 아니었다. 무능한 정부의 책임 떠넘기기를 지적한 것이다. 노엘 갤러거는 2016년 6월 22일 캐나다 『CBC Music』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투표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매일 밤 TV에 나오는 정치인들은 이게 영국을 바꿀 수 있는 중대한 결정이다 어쩐다 지껄인다. 좋아. 우리는 빌어먹을 나라를 잘 이끌라고 너희한테 빌어먹을 돈을 주고 있어. 그것을 왜 사람들에게 물어봐? 99%의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여겨. 정치인들이 전쟁할 때 대국민 투표를 했어? 아니잖아. 빌어먹을 놈들”  

 
 

   이처럼 노엘 갤러거는 대놓고 특정 세력을 지지한다기 보다 촌철살인같은 멘트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따지고 보면 정치에 있어서 절대선이나 절대악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노엘 갤러거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저 정치인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사회 문제와 별개로 음악적으로는 노엘 갤러거가 이전과 같은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는 2011년 앨범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를 발매했고, 2015년과 2017년에도 각각 《Chasing Yesterday》와 《Who Built the Moon?》을 내놓았다. 노엘 갤러거라는 이름이 있으니 세 앨범 모두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했지만 오아시스 때만큼 폭발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리암 갤러거의 비디 아이도 초창기에는 꽤 주목을 받았지만 각자의 사정을 이유로 2014년 해체됐다.  

   이 때문에 음악팬들은 수년째 오아시스 재결합을 외치고 있다. 갤러거 형제는 가끔씩 재결합에 대한 언급을 할 때도 있지만 10년이 넘도록 실현되지 않고 있다. 2020년 3월, 리암 갤러거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컴온. 노엘 갤러거”라고 적는 등 오아시스에 대한 애정이 있음을 보여줬다. 노엘 갤러거도 2021년 신년을 맞아 트위터를 통해 “노엘은 너를 오랜 기간 좋아했고, 2021년은 우리의 해야. 너도 알지. 컴온 리암 갤러거”라고 전했다. 과연 이 둘은 언제 다시 뭉칠 수 있을까. 재결합에 대해서는 본인들만 알겠지만 노엘과 리암이 뭉친 오아시스를 보고 싶은 팬들의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이전 11화 '비틀즈의 전설' 존 레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