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영국은 유례없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영국의 식민지들이 하나 둘 독립했고, 제조업은 독일과 일본에 밀리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의 경제성장률을 살펴보면 1973년에는 6.52%로 선방했지만 1974년 -2.48%, 1975년 -1.47%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결국 영국은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지원을 받는 신세로 전략했고, 1976~1979년 플러스 성장을 거두며 한숨 돌렸다. 하지만 오일쇼크로 인해 1980년 경제성장률 -2.03%, 1981년 -0.79%를 기록하는 등 경제는 다시 곤두박질쳤다. 기업의 실적이 악화하자 하나 둘 구조조정을 하기에 이르렀고,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로 이어졌다.
이렇게 암울한 영국의 분위기 속에서 나온 음악이 바로 펑크 음악이다. 펑크는 구직에 실패한 젊은이들의 분노를 담은 음악으로 정부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펑크는 단순한 코드 진행과 간단한 연주가 특징이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정신에 입각한 음악이었다.
사실 펑크는 1960년대부터 어느 정도 알려진 음악 장르였다. 그러나 이때는 아마추어 밴드들이 음악을 간단하게 커버하는 수준에 그쳤고, 주류 장르로 평가받지 못했다. 1970년대 들어 미국 뉴욕의 빈민가를 중심으로 펑크가 인기를 끌었지만 반짝 인기일 뿐이었다. 텔레비전, 패티 스미스 등 인기를 얻었던 펑크 음악가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너무 빨리 은퇴해버렸고, 1970년대 미국은 세대 간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돼 대중들이 펑크 정신에 크게 공감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영국 대중들은 펑크 음악에 환호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에서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그 열기의 절정은 1977년 섹스피스톨즈가 발매한 앨범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였다. 영국 정부, 기독교, 아일랜드까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비판한 섹스피스톨즈는 순식간에 펑크의 영웅으로 자리 잡았고, 그를 추종하는 펑크 밴드가 런던 거리에 넘쳐났다. 섹스피스톨즈의 음악은 코드 3개로만 연주하는 매우 단순한 것이었기에 교육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밴드도 쉽게 따라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섹스피스톨즈는 소속사와의 불화로 1978년 해체되고 만다.
섹스피스톨즈는 해체했지만 펑크의 정신만큼은 죽지 않아 수많은 아류 밴드들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그 선두주자 중 하나가 바로 조 스트러머가 이끄는 밴드 클래시다. 스트러머가 클래시를 결성한 이유도 단순한데 그저 섹스피스톨즈의 공연을 보고 감동해 지인들과 밴드를 조직했던 것이었다. 클래시의 시작은 섹스피스톨즈의 아류였지만 1986년까지 활동하면서 영국 펑크의 대표주자로 우뚝 서게 된다.
스트러머의 어렸을 적 꿈은 만화가였다. 꿈을 위해 미술대학에 재학 중이던 스트러머는 어느 날 한 친구가 우쿨렐레를 사서 연주하는 걸 보고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기타를 배워 친구들과 101ers라는 밴드를 조직해 종종 공연 무대에도 올랐다. 이때까지 스트러머는 취미로 음악을 즐겼지만 섹스피스톨즈의 공연을 본 후 전업 음악가로 전향하게 된 것이다.
런던SS라는 밴드에서 스트러머의 영입을 시도하자 스트러머는 101ers를 탈퇴해 런던SS로 팀을 옮겼다. 런던SS가 그렇게까지 유명한 밴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섹스피스톨즈와 친분이 있었고, 언더그라운드에서도 약간의 이름은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멤버 개인의 사정으로 런던SS는 1976년 해체됐고 런던SS 기타리스트 믹 존스와 베이시스트 폴 시모넌 그리고 스트러머가 팀을 이뤄 클래시를 조직했다. 드러머 테리 차임스까지 영입해 4인조 멤버 구성을 이뤘다.
클래시의 1977년 첫 앨범 《The Clash》는 데뷔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펑크 열풍에 힘입어 영국 차트 12위, 빌보드 차트 126위를 기록했다. 126위가 높은 순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영국의 일개 펑크 밴드가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도 어찌 보면 대단한 것이었다. 《The Clash》 발매 후 차임스는 팀을 떠났고,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니키 ‘토퍼’ 히든이 드러머로 합류했다.
펑크 음악이 대부분 그렇듯 《The Clash》도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았다. <White Riot> <London's Burning> 등 제목에서부터 대놓고 폭동과 방화를 외쳤다. 재밌는 점은 영국 밴드인 클래시가 미국도 싸잡아 비판했다는 것이다.
‘양키 형사들은 항상 TV에 나와. 왜냐면 미국의 킬러들은 일주일에 7번 일하거든. 성조기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워터게이트 테이프를 인쇄하자고. 나는 뉴웨이브(펑크의 한 장르)를 향해 경례할게. 아무도 탈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미국이 지겨워. 하지만 뭐 어쩌겠어?’ - <I'm So Bored With the U.S.A.>
스트러머는 1978년 반나치동맹(ANL)에 가입했다. ANL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노동당과는 다르다)을 중심으로 1977년 결성된 반파시즘 단체다. ANL은 ‘인종차별 반대 록(RAR)’ 운동을 주도했고, 클래시뿐 아니라 톰 로빈슨, X레이 스펙스 등의 음악가들도 RAR 운동에 동참했다.
RAR에 동참한 음악가들은 비틀즈나 레드 제플린 등 정상급 음악가들에 비하면 인지도는 떨어졌다. 그렇지만 영국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RAR 운동에 환호했다. 1978년 4월 런던 빅토리아 공원에서 열린 RAR 공연에 1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모였는가 하면 1978년 9월 하이드 공원에서 열린 공연에서도 비슷한 숫자의 관객이 모였다. 이후 RAR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고, 비슷한 이름의 ‘성차별 반대 록(SAR)’ 운동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클래시의 위상도 영국의 아웃사이더 펑크 밴드에서 좌파의 상징 밴드로 격상했다.
스트러머의 각종 기행도 클래시 인지도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스트러머는 이탈리아의 극좌 테러조직 ‘붉은 여단’과 서독의 극좌파 무장단체 ‘적군파’의 문양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1977년에는 한 호텔에서 베갯잇을 훔치다가 경찰에 체포돼 벌금 100파운드를 내고 나서야 풀려났다. 다른 호텔에서는 벽에 ‘더 클래시’라고 락카칠을 했다가 벌금을 내기도 했다. 스트러머의 행동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불만으로 가득했던 당시 영국 젊은이들은 오히려 스트러머를 동경했다.
이 기세를 몰아 1978년 11월 발매된 클래시의 2집 앨범 《Give 'Em Enough Rope》는 영국 차트 2위에 올랐다. 클래시는 돌려서 비판하지 않고 그냥 대놓고 마구잡이로 비판했다. 테러가 발생한다느니 내전이 일어난다느니 정상적이지 않은 가사 투성이었다. 오히려 이 점이 클래시의 인기 요인이 됐는데 당장 일자리를 잃은 영국 젊은이들이 시적인 가사를 즐길 여유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분노하건 말건 영국의 경제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런던 거리를 방황해야만 했다. 클래시도 분노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이 분노를 터뜨릴만한 앨범을 기획하게 된다. 그렇게 1979년 12월 발매된 앨범이 그 유명한 《London Calling》이다. 그야말로 런던의 불우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앨범으로 전쟁, 기아, 자연재해 등등 온갖 악재를 다 겪고 있는 영국 젊은이들의 비참한 삶을 묘사했다.
‘런던은 모방 구역에 알린다. 잊어버려 너는 혼자 할 수 있어. 런던은 죽음의 좀비들에게 알린다. 참지 말고 숨을 쉬어. 런던은 알린다. 나는 소리 지르기 싫어. 그러나 우리가 얘기할 때 나는 네가 졸고 있는 걸 봤어. 런던은 알린다. 우리는 더 이상 약에 취하지 않아. 노란 눈을 가진 한 녀석 빼고 말이야.’ - <London Calling>
《London Calling》은 단순히 분노를 표출하는 앨범이 아니었다. 이전까지 펑크는 단순한 코드의 간단한 음악이라는 편견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클래시는 레게, R&B, 스카 심지어 헤비메탈 사운드까지 앨범에 녹여냈고, 이는 곧 포스트펑크의 시발점이 됐다. 포스트펑크는 기존의 펑크처럼 간단한 코드를 사용하지만 기타 외에 다양한 악기와 사운드를 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London Calling》이 최초의 포스트펑크 앨범은 아니지만 포스트펑크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사실상 이때부터다.
《London Calling》은 사회적 비판과 새로운 음악의 시도 등으로 현대에 와서 더욱 평가가 높아지는 앨범이다. 《London Calling》 2013년 『NME』가 선정한 500대 명반 순위 39위에 올랐고, 2020년 『Rolling Stone』이 선정한 500대 명반에서는 16위에 이름을 올렸다. 펑크 앨범 중에서는 가장 높은 순위였다.
섹스피스톨즈와 클래시 덕분인지 1970년대 후반 런던에서 인기 있다는 음악가는 대부분 펑크 음악가들이었다. 대표적인 영국 펑크 음악가로는 엘비스 코스텔로가 꼽힌다. 코스텔로는 모범생 같은 외모로 반항과는 거리가 멀어보였고, 다른 펑크 밴드에 비하면 그닥 시끄러운 음악도 아니었다. 그러나 코스텔로는 특유의 풍자로 영국 보수주의자들을 비판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코스텔로의 노래 <She>가 영화 『Notting Hill』에 삽입되면서 한국에서도 코스텔로의 이름은 나름 알려졌다.
댐드는 섹스피스톨즈, 클래시와 더불어 영국의 3대 펑크 밴드로 거론된다. 댐드의 당시 차트 성적이 좋은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넘치는 에너지 덕에 공연은 항상 만원이었다. 클래시와 마찬가지로 댐드도 사이키델릭 등 다른 장르 음악을 적극 받아들여 포스트펑크의 중흥을 이끌었다. 이밖에 버즈콕스, 999 등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영국은 그야말로 펑크 세상이었다.
섹스피스톨즈 해체 후 영국 펑크를 대표하는 음악가는 단연 클래시였다. 음악뿐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클래시의 인기를 반영해 1980년 영화 『Rude Boy』가 개봉했다. 영화 내용은 한 클래시 팬이 꿈도 희망도 없이 살다가 펑크 밴드 매니저가 된다는 것이다. 클래시 멤버들도 영화 내 RAR 공연, 《Give 'Em Enough Rope》 녹음 등의 장면에서 영화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클래시와 펑크의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82년 헤로인 중독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워진 드러머 히든이 탈퇴하고, 옛 멤버 테리 차임스가 클래시에 재합류했다. 평소 분위기메이커를 담당하던 히든의 부재는 멤버 간 불화로 이어졌다. 내분 끝에 차임스는 1983년 US페스티벌을 앞두고 다시 탈퇴했다. 공연을 앞둔 클래시로서는 난감해졌고, 젊은 드러머 피트 하워드를 부랴부랴 영입해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US페스티벌은 사실상 클래시의 마지막 영광이었다. US페스티벌이 끝난 후 클래시는 별 다른 활동이 없었고, 멤버 간 불화와 무관심만 가득했다. 1983년 9월, 스트러머와 시모넌은 존스의 탈퇴를 요구했고, 존스는 미련 없이 클래시를 나와 제너럴퍼블릭이라는 밴드를 조직했다. 스트러머는 기타리스트 닉 셰퍼드와 빈스 화이트를 새로운 멤버로 영입해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했다.
클래시는 1985년 앨범 《Cut the Crap》을 발매하면서 클래시의 부활을 준비했지만 이미 예전 같은 위상은 사라졌다. 무엇보다 새로운 멤버들이 존스만큼의 에너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의욕도 열정도 사라진 스트러머는 1986년 초 멤버들과 상의해 클래시의 해산을 결정했다.
클래시가 해산할 무렵 펑크의 열기도 거짓말처럼 식어버렸다. 영국의 경제는 마거릿 대처 총리의 개혁으로 어느 정도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고, 유명 펑크 밴드들은 하나 둘 은퇴하거나 해체됐다. 펑크의 부활과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던 스트러머는 자존심을 죽이고 존스를 찾아가 재결합을 요청했다. 존스는 당시 제너럴퍼블릭에서 나와 빅 오디오 다이나마이트라는 밴드에서 활동 중이었다. 각자의 사정으로 스트러머와 존스가 같은 밴드로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서로의 곡 녹음에 도움을 주는 등 관계는 어느 정도 회복했다.
클래시가 해체되고 펑크의 인기도 사라지자 스트러머는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86년 영화 『Sid and Nancy』의 사운드트랙 녹음에 참여해 <Love Kills> <Dum Dum Club> 등의 곡을 선보였다. 이어 1987년 영화 『Walker』와 『Straight to Hell』에서 스트러머는 사운드트랙 작업을 맡는 동시에 배우로도 출연했다. 이외에도 1988년 영화 『Permanent Record』의 사운드트랙 녹음에 참여했고, 1989년 『Mystery Train』 1990년에는 『I Hired a Contract Killer』에 출연하는 등 영화에 자주 얼굴을 비췄다.
스트러머는 『Permanent Record』 사운드트랙 작업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백밴드 ‘라티노 로커빌리 워’와 음악적 재기를 시도했다. 훗날 펄 잼의 멤버로 유명해지는 잭 아이언스도 당시 라티노 로커빌리 워 소속이었다. 스트러머가 1989년 발매한 앨범 《Earthquake Weather》의 백밴드는 라티노 로커빌리 워였고, 프로듀싱은 스트러머가 직접 맡았다. 간만에 발매한 앨범이기에 기대가 컸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쉽게도 차트에 진입조차 하지 못했다.
추억의 음악가 스트러머가 회자된 건 1990년 걸프 전쟁 때였다. 당시 미군 폭탄에 ‘Rock the Casbah’라는 문구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문구는 1982년 발매된 클래시의 싱글 <Rock the Casbah>와 같은 문구였다. 미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문구를 사용했으며 단순 폭탄에만 적은 것이 아니라 미군 라디오에서도 <Rock the Casbah>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Rock the Casbah>은 지나치게 엄격한 아랍의 법을 다룬 곡이지만 결코 전쟁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스트러머는 그의 음악이 전쟁에 사용된다는 소식을 듣자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1년 클래시의 싱글들이 CD 형태로 재발매되면서 클래시를 추억하는 팬들도 늘어났다. 논란의 곡 <Rock the Casbah>는 발표 당시 영국 차트 30위에 머물렀지만 재발매 후 영국 차트 15위에 올라 9년 만에 기록을 갈아치웠다. 심지어 1982년 싱글 <Should I Stay or Should I Go>는 9년 만에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스트러머느 유고슬라비아 내전 반대 공연에 참여하는 등 반전 운동에 힘을 보탰다.
1999년에는 스트러머가 존스와 시모넌을 만나 클래시의 재결합을 논의했다. 예전처럼 떠들썩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클래시의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장 재결합이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클래시의 1978~1982년 공연 음원을 모은 라이브 앨범 《From Here to Eternity: Live》를 발매했고, 2000년에는 클래시의 다큐멘터리 『Westway to the World』를 공개했다. 클래시 재결합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2002년 11월 로큰롤 명예의 전당 위원회는 클래시를 명예의 전당에 헌액한다고 밝혔다. 클래시는 2003년 3월 정식으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었고, 스트러머, 존스 그리고 히든은 명예의 전당 위에서 재결합을 선포하자고 뜻을 모았다. 시모넌은 그런 값비싼 공연 무대에 오르는 건 클래시의 정신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의견을 달리했다. 핵심 멤버 시모넌 없이는 재결합도 무의미했기에 클래시 멤버들은 수차례 회의를 거듭했다.
그런데 정말 뜬금없이 2002년 12월 22일 스트러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인은 선천성 심장병이었다. 아무런 예고가 없었던 사망 소식에 재결합을 기대했던 팬들도, 멤버들도 아연실색했다. 스트러머 사망 당시 영국 가수 빌리 브래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클래시에서 스트러머는 정치적 엔진이었다. 스트러머 없이는 클래시에게 정치적인 의미가 없다. 그리고 클래시 없이는 펑크 음악의 정치적 풍자가 따분한 것이 된다”고 회고했다.
1970년대 중반 클래시는 암울했던 영국에 꿈과 희망을 주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클래시의 공연은 대부분 저렴한 비용에 볼 수 있었고, 심지어는 무료 공연도 적지 않게 진행했다. 정상의 인기를 지녔음에도 돈보다 젊은 관객들을 택한 것이다. 클래시의 인기는 비교적 짧았고, 해체 후 스트러머의 음악적 행보가 크게 성공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야말로 짧고 굵게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스트러머 사망 후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논란 대상에 오르곤 한다. 사망 1년 후인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벌어졌고, 미국은 또 전쟁터에서 <Rock the Casbah>를 틀어댔다. 지금도 아랍 관련 분쟁이 발생하면 <Rock the Casbah>가 흘러나온다. 비참한 시절 젊은이들을 대표했던 스트러머가 전쟁터의 주연이 돼버린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