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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Sep 13. 2022

'모타운발 흑인의 반란' 마빈 게이

   19세기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디트로이트는 일약 미국을 대표하는 산업도시로 떠올랐다.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 본사가 디트로이트에 있었고, 자동차 산업 성장에 힘입어 디트로이트도 20세기 초 미국 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도시로 성장했다. 동시에 오갈 곳 없는 흑인들이 디트로이트에 몰려들었고 인종 간 갈등이 심심찮게 벌어지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흑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역시 음악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와중에도 나이트클럽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음악인이 되려는 사람 역시 적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디트로이트에 기반을 둔 음반 제작 회사 모타운이 있었다. 흑인 음악에 있어서 모타운의 영향력은 현재까지도 이어질 정도다.  

 
 

   1950년대 후반,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베리 고디는 디트로이트에서 재즈 전문 음반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고디는 지역 음악가들과 친분을 쌓기 시작했고, 음악적 감각도 있었는지 작곡을 해주기도 했다. 이후 고디는 평소 친하게 지낸 가수 스모키 로빈슨과 의기투합해 탐라 레코드라는 음반 제작사를 만들었고, 1960년에는 다른 레이블을 통합해 모타운 레코드를 설립했다.  

   스모키 로빈슨은 밴드 미라클즈를 조직한 후 모타운을 통해 싱글 <Shop Around>을 발매했다. <Shop Around>는 빌보드 차트 2위에 오르는 대히트를 치며 앞으로 모타운의 시대가 올 것을 예고했다. 미라클즈는 이후에도 빌보드 차트에 자주 이름을 올렸지만 아쉽게도 1위를 차지한 적은 없었고, 사실 <Shop Around>를 뛰어넘는 성적도 내지 못했다.  

   모타운의 다음 흥행 타자는 슈프림즈였다. 슈프림즈는 1964년 싱글 <Where Did Our Love Go>가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Baby Love>와 <Come See About Me> 등 1964년에만 3개의 곡을 1위에 올렸다. 1965년에도 <Stop! In the Name of Love> <Back in My Arms Again> <I Hear a Symphony> 3곡이 빌보드 1위를 차지했다. 슈프림즈는 1960년대 무려 12개의 빌보드 1위곡을 만드는 등 그야말로 비틀즈와 비견될 정도의 성적을 거뒀다.  

   모타운은 소속 음악가들은 대부분 흑인이었다. 고디 본인부터가 흑인이었고, 슈프림즈의 무지막지한 성적에서 볼 수 있듯 리듬앤블루스(R&B)와 소울 등 흑인 음악은 백인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다. 음악은 현실적으로 흑인이 성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기도 했다. 고디의 사업능력도 모타운의 성공 배경으로 꼽힌다. 그는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알고 있었고, 그런 곡들을 꼽아서 앨범을 제작했다. 그러다보니 모타운 소속 음악가들에게서 사회성 짙은 음악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몇몇 음악가들이 개인적으로 인권 캠페인에 참여하거나 자선 공연을 여는 수준이었다.  

   당시 모타운은 슈프림즈와 스티비 원더가 대중적인 슈퍼스타로 모타운의 흥행을 주도했지만 언제까지 이들만 믿고 갈 수는 없었다. 슈프림즈의 플로렌스 발라드가 1967년 고디와의 갈등 끝에 팀을 탈퇴한 후 슈프림즈도 서서히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  

 
 

   이런 모타운의 분위기에서 나타난 새로운 스타가 바로 마빈 게이다. 게이는 1961년 모타운에서 데뷔해 1965년 싱글 <How Sweet It Is (To Be Loved by You)>가 빌보드 차트 6위까지 오르는 등 나름의 인기를 구사하고 있었지만 슈프림즈나 스티비 원더와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이는 학창시절 각종 밴드에서 보컬을 맡은 인기 있는 학생이었지만 집안에서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집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1956년 참다못한 게이는 가출을 택해 공군에 입대했으나 군 생활도 순탄치 못했다. 군대의 엄격함에 적응하지 못한 게이는 결국 정신병이 있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중도 제대하게 된다. 제대 후 게이는 친구들과 두왑(1950년대 유행했던 R&B 스타일 음악) 보컬그룹 마퀴즈를 조직해 본격적인 음악 활동에 나섰다.  

   마퀴즈는 주로 워싱턴 D.C.에서 활동하며 자신들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1957년에는 싱글 <Wyatt Earp>를 발매하기도 했지만 차트에 오르지도 못하는 등 주목은 전혀 받지 못했다. 마퀴즈는 이후 하비 푸쿠아에게 발탁돼 그의 백보컬 그룹 문그로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푸쿠아와 마퀴즈 모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해 결국 1960년 해체하게 된다.  

   게이는 마퀴즈 해제 후 푸쿠아와 디트로이트로 떠났다. 푸쿠아가 디트로이트 지역 음반 제작사인 트리-파이 레코드와 세션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무작정 푸쿠아를 따라간 게이 역시 디트로이트 지역 사람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고 베리 고디의 눈에도 띄게 된다. 물론 게이의 뛰어난 실력이 고디의 눈에 띈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그와 인연을 맺게 된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 시기 베리 고디의 누나 안나 고디와 게이가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게이와 안나 고디는 1963년 정식으로 결혼하게 된다.  

   아무튼 게이는 모타운과 정식 계약을 맺어 1961년 싱글 <Let Your Conscience Be Your Guide>와 앨범 《The Soulful Moods of Marvin Gaye》를 발매했다. 그렇지만 철저한 무명 가수였던 게이는 차트 순위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그래도 1962년 발매한 싱글 <Stubborn Kind of Fellow>는 빌보드 차트 46위까지 오르는 등 점점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차트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점점 괜찮은 가수가 됐다. 소위 메가히트 싱글은 없었지만 그가 싱글을 내면 차트 10~20위 사이에는 자주 올라갔고, 가끔 10위권 안에도 들어가곤 했다.  

   게이의 본격적인 전성기는 1968년부터 시작한다. 그가 발매한 싱글 <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가 빌보드 차트 1위, 영국 차트 1위 등 각종 차트를 석권하며 일약 스타가수에 등극한 것이다. 1969년 싱글 <Too Busy Thinking About My Baby>도 빌보드 차트 4위에 오르며 꽤 괜찮은 가수 수준을 넘어선 모타운의 차세대 스타로 올라서게 된다.  

 
 

   1960년대 후반까지 게이는 인기 음악가로 대접받았지만 대중들이 그를 사회운동과 연관 짓지는 않았다. 게이는 본인이 흑인으로서 겪었던 차별 대우, 군대에서 느꼈던 부조리, 베트남 전쟁 등을 음악에서 다루고 싶었지만 모타운의 수장 고디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당연히 고디와 게이의 신경전으로 이어졌고, 게이는 차기 앨범 《What's Going On》을 녹음하면서 본인이 직접 프로듀싱을 하는 등 독자적인 앨범 발매 준비에 나섰다. 고디가 끝까지 앨범 발매를 거부하자 게이는 파업이라는 초강수를 두기에 이른다. 결국 고디는 게이의 뜻을 꺾지 못했고, 게이의 지향점이 드러난 앨범 《What's Going On》이 1971년 5월 발매됐다. 게이는 『Rolling Stone』에 《What's Going On》을 제작할 당시 심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69년과 1970년, 나는 내 음악이 말하는 모든 컨셉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상황뿐 아니라 베트남에 있는 동생이 보내준 편지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의 영혼에 다가갈 수 있는 곡을 쓰고 싶다면 내 모든 판타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 2003년 12월 11일 『Rolling Stone』  

 
 

   고디의 우려와 달리 《What's Going On》은 빌보드 차트 6위에 오르며 이때까지 게이가 발매한 앨범 중 가장 좋은 차트 성적을 거뒀다. 이 앨범은 뛰어난 음악성과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 덕에 지금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일례로 《What's Going On》은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동생을 위한 곡 <What's Happening Brother>, 어린이들을 위한 <Save the Children>, 환경오염 문제를 호소하는 <Mercy Mercy Me>까지 광범위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곡들이었다.  

   게이가 《What's Going On》을 제작하게 된 계기는 베트남 전쟁, 1967년 디트로이트 폭동, 켄트주립대 발포사건, 크게 세 가지로 알려졌다. 1967년 당시 경찰이 무허가 술집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흑인 손님 80여 명을 무더기로 체포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반발한 흑인들은 처음에는 집단 항의로 시작하더니 이내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디트로이트 폭동 관련 사망자는 43명, 부상자는 수천 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켄트주립대 발포사건은 1970년 5월 켄트주립대에서 벌어진 반전 시위 도중 주방위군의 발포로 대학생 4명이 숨진 사건이다. 이후 학교는 휴교에 들어가 여름방학 전까지 정상적인 운영을 하지 못했다. 또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전역에 있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반전 시위를 벌였고, 동맹휴학에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What's Going On》은 사회문제를 다룬 것 외에 소울 음악 최초의 컨셉 앨범이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단순히 여러 곡을 넣어 앨범을 만든 게 아닌 앨범의 수록곡이 이어지며 하나의 스토리를 만드는 마치 뮤지컬과 같은 것이었다. 이전에도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등 컨셉 앨범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흑인 음악계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었다.  

   사회에 강렬한 메시지를 줬다는 점에서 《What's Going On》은 항상 명반 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다. 심지어 2020년 『Rolling Stone』이 선정한 세계 500대 명반에서 《What's Going On》은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나 비치 보이즈의 《Pet Sounds》, 밥 딜런의 《Highway 61 Revisited》 등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은 평가를 받는 대표적인 예다.  

   이후 모타운 소속 흑인 가수들은 너도 나도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고, 고디도 사회운동을 반대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모타운은 1970년 ‘블랙 포럼 레코드’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설립하기도 했다. 주로 마틴 루터 킹 목사, 스토클리 카마이클, 엘라이 브라운 등 흑인 사회운동가들의 연설을 녹음해 앨범으로 만드는 곳이었다. 초창기에는 활동이 많지 않았지만 《What's Going On》 발매 후 활동을 늘어난 것이었다. 1971년 블랙 포럼 레코드를 통해 발매된 킹 목사의 연설 《Why I Oppose The War In Vietnam》이 그래미상 최우수 낭독 앨범상을 수상하면서 모타운도 일약 사회운동의 상징적인 곳이 된다. 게이도 1975년 유네스코 자선공연을 하는 등 사회운동을 이어갔고, 그 결과 UN 사무실에도 초대하는 거물급 음악가가 됐다.  

 
 

  ‘1960년대 초반 일부 백인이 흑인 인권 운동 선봉에 서기는 했지만 비 사회운동가들이 흑인과 동료로 사회운동에 참여한 건 라디오와 무도장에서 흘러나오는 모타운 음악 덕분이었다. (…) 내 시각으로는 고디의 뛰어난 비즈니스가 내 세대 백인들이 흑인 문화에 열광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부모 세대에 있었던 인종 차별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 제국이 없었다면 버락 오바마도 대통령으로 뽑힐 수 없었을 것이다. 음악을 통한 통합이 없었다면 다수의 백인들이 흑인에게 표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2013년 9월 9일 『The Guardian』  

 
 

   게이의 활약 덕에 모타운은 흑인 사회운동의 상징이 됐지만 안타깝게도 그 영광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1972년 모타운은 본사를 LA로 이전했다. 평소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고디가 할리우드와 연계한 사업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게이와 스티비 원더에 이은 차세대 스타로 주목받았던 잭슨 파이브가 1975년 모타운을 떠나 에픽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고, 이후 모타운은 이렇다 할 거물을 발굴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일명 H-D-H로 불린 모타운의 작곡가 에디 홀랜드, 라몬트 도지어, 브라이언 홀랜드가 부당한 대우를 이유로 모타운을 떠나면서 모타운 음악의 인기도 갈수록 떨어졌다. 여담으로 잭슨 파이브는 에픽 레코드에서 잭슨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 멤버 중 한 명인 마이클 잭슨이 1979년 솔로 앨범 《Off the Wall》을 발매하면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게이는 1973년 앨범 《Let's Get It On》이 빌보드 차트 2위, 1976년 앨범 《I Want You》는 차트 4위에 오르는 등 좋은 성적을 이어갔다. 또 1976년에는 처음으로 유럽 투어를 떠났고, 당시 공연을 녹음한 《Live at the London Palladium》 앨범도 1977년 발매됐다. 이 앨범은 라이브 앨범임에도 빌보드 3위라는 대단한 성적을 거뒀다. 이 시기 게이는 모타운과 100만 달러 규모의 재계약을 맺으며 흑인 음악가로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모타운의 기세가 예전 같지 않으면서 게이의 인기도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1970년대 후반, 미국 경제는 호황 국면을 맞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미국 젊은이들도 골치 아픈 사회문제에 관심을 잃게 됐다. 음악도 그저 재밌게 춤추고 놀 수 있는 디스코 음악이 유행했고, 이에 따라 게이의 음악은 빠르게 잊혀졌다. 물론 스티비 원더처럼 1970년대 후반에도 정상급 인기를 누린 모타운 가수가 없지 않았지만 게이는 원더와 달리 자기관리를 제대로 못한 것이 문제였다.  

   게이는 평소 아내 안나 고디와 크고 작은 불화가 있었고, 1973년부터는 사실상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결국 1975년 안나 고디는 이혼을 신청해 1977년 법적으로도 완전히 남이 됐다. 사실 게이는 1973년부터 재니스 헌터라는 여성을 만나고 있었다. 재니스 헌터는 《Let's Get It On》 앨범 프로듀서 에드 타운센드의 전 여자친구 바바라 헌터와 재즈 음악가 슬림 갈리아드의 딸로 꽤나 복잡한 관계였다. 타운센드와도 친분이 있었던 재니스 헌터는 《Let's Get It On》 앨범 녹음실에 자주 얼굴을 비쳤고 게이와 깊은 관계에 이르게 된다.  

   안나 고디와 별거 중이었던 1974년, 게이와 헌터 사이에서 노나 게이라는 딸까지 태어났다. 여담으로 노나 게이는 훗날 배우이자 가수로 활동하며 2003년 영화 『The Matrix Reloaded』와  『The Matrix Revolution』에 출연해 인기를 얻게 된다. 2010년 이후로는 별 다른 활동이 없는 상태다.  

   게이와 헌터는 1977년 10월 정식으로 결혼했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무렵 게이는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헌터에게도 마약을 권하기에 이른다. 마약을 거절하면 가정 폭력으로 이어지곤 했다. 헌터는 2015년 8월 『Mirror』와의 인터뷰에서 “게이의 눈은 마치 원한을 품은 것처럼 붉게 변했다. 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그는 식칼을 들고 와 내 목구멍에 넣으려 했다. 나는 겁에 질렸고, 온몸이 마비되는 듯했다. 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라고 털어놨다.  

   결국 헌터는 1979년 이혼 소송에 들어가 1981년 2월 정식으로 이혼한다. 이후 원더는 약물을 찾는 일이 잦아졌고 그의 몸도 점점 망가져 갔다. 이 당시 게이는 세금 문제로 미국 국세청과 다투는 등 정신적으로 힘든 일도 많았다. 1981년 발매한 앨범 《In Our Lifetime》은 빌보드 차트 32위를 기록해 게이 치고는 저조한 성적이었다.  

 
 

   이 시기 게이는 나름대로 건실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81년 2월부터 프로모터인 프레디 코서트 소유의 벨기에 아파트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코서트의 요구에 따라 게이는 약물을 멀리했고, 교회에 다니며 때로는 운동도 하는 나름대로 성실한 삶을 살았다. 새롭게 태어난 게이는 1982년 앨범 《Midnight Love》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 7위까지 올라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줬다. 그는 앨범 수록곡 <Sexual Healing>으로 1983년 그래미상 최우수 R&B 보컬상도 받았다. 그간 게이는 그래미상 후보 단골손님이었지만 실제 수상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안타깝게도 게이의 영광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게이는 벨기에에서 미국 LA로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생활했다. 게이와 그의 아버지는 사이가 나쁜 것으로 유명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감정도 사라지는 듯했다. 게이는 1983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버지에게 호신용 권총까지 선물해줬다.  

   해를 넘겨 1984년 3월 31일 게이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보험 서류를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말다툼을 벌였다. 게이는 부모님을 말리고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그저 가끔 있는 사소한 말싸움이었다. 그러나 자정을 넘긴 4월 1일 새벽, 게이의 아버지는 게이의 침실로 들어와 별안간 총을 쏴댔다. 총알은 게이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게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슬프게도 게이 아버지가 사용한 총은 게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그 권총이었다. 게이의 아버지는 뇌종양을 앓고 있어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6년을 선고 받았다.  

   한때 흑인 사회운동의 아이콘이었던 게이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최후를 맞았다. 1970년대 후반 보여준 게이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젊은 음악팬들을 게이를 그저 《What's Going On》 앨범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오늘날 게이의 업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가 있었기에 모타운의 사회운동이 빛을 볼 수 있었고, 많은 흑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달할 수 있었다. 물론 인종 차별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사고가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게이의 출연 이후 일반 흑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런 게이가 흑인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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