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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 Sep 16. 2022

'메탈을 통한 반전 운동' 데이브 머스테인

   1970년대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한 헤비메탈은 1980년대 들어 소위 대중음악의 대세로 떠올랐다. 영국에서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 열풍이 불면서 주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 등 대형 헤비메탈 밴드가 등장하는가 하면 미국에서는 팝 메탈, 익스트림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등 별별 하위 장르가 탄생하면서 밴드 하면 무조건 메탈 계열 음악을 한다는 인식까지 심어줬다.  

   록의 기본 정신이 저항인 만큼 대다수의 밴드들은 반항적인 이미지를 가졌다. 그 중에서도 스래시 메탈은 사회 문제에 가장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스래시 메탈은 더블베이스 드럼, 저음역대의 기타 리프와 고음역대의 기타 솔로 등이 특징으로 하드코어 펑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장르다. 음악 외적으로는 사회 참여적 메시지, 저항적인 가사가 돋보인다. 마침 스래시 메탈의 전성기는 공화당 출신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기 때였다.  

   평론가들은 대체로 스래시 메탈의 시작으로 1970년대 중반에 등장한 모터헤드를 꼽는다. 1980년대에는 소위 ‘빅4’라 불리는 메탈리카, 메가데스, 슬레이어, 앤스랙스, 4개의 밴드가 스래시 메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하나 같이 전쟁을 비판하고 종교와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밴드들이었다. 특히 메탈리카와 메가데스는 1980년대 내내 라이벌 구도를 이루면서 팬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메가데스의 리더이자 보컬 겸 기타리스트 데이브 머스테인이 메탈리카 출신이라는 점도 이슈 몰이에 한 몫 했다. 실제 머스테인은 메탈리카나 메가데스의 주요 멤버들 중 가장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1961년 태어난 머스테인은 어릴 때부터 기타에 관심을 보였고, 1979년부터 패닉이라는 밴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패닉은 동네에서 노는 수준의 밴드였기에 머스테인이 만족할만한 라인업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머스테인의 눈길을 끄는 한 일간지 광고가 있었다. 다이아몬드 헤드, 아이언 메이든 같은 메탈 음악가 되고 싶은 한 드러머가 밴드 멤버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머스테인이 활동했던 LA에는 음악가를 꿈꾸는 청년들이 넘쳐났으며 드러머 라스 울리히도 그 중 한명이었다. 밴드를 하고 싶었던 울리히는 지역 일간지에 밴드 멤버 구인 광고를 실었고, 이를 본 기타리스트 제임스 헷필드가 밴드 활동을 같이 하기를 제안했다.   

   한편 패닉을 탈퇴했던 머스테인도 울리히에게 연락해 밴드에 합류했다. 사실 울리히와 헷필드는 머스테인의 기타 실력보다는 그가 사용하는 고가 장비에 혹해 가입을 허락한 것이었다. 이후 헷필드는 친구 론 맥고브니를 베이시스트로 영입해 4인조 밴드를 꾸렸다. 이것이 1980년대 대표 메탈 밴드 메탈리카의 시작이었다. 다만 맥고브니는 부족한 실력 탓에 얼마가지 않아 밴드에서 쫓겨났고 클리프 버튼이 후임 베이시스트로 영입됐다.  

   인지도만 상대적으로 부족했을 뿐 이미 정상급 실력을 갖고 있던 메탈리카의 성공은 시간문제였다. 그들이 공연하는 클럽은 늘 만원이었다. 당시 공연 프로모터로 일하던 존 자줄라는 메탈리카의 앨범을 발매하고자 1982년 대출까지 받아가며 독립 레이블 ‘메가포스 레코드’를 설립했다. 지금은 메가포스 레코드가 대형 레이블로 성장했지만 시작은 순전히 메탈리카의 앨범을 발매하기 위해서였다. 모험이라면 모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앨범 발매를 앞둔 메탈리카와 머스테인은 밝은 앞날을 꿈꿨겠지만 실상은 머스테인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때였다. 메탈리카 멤버들이 평소 방탕한 행실을 이유로 머스테인을 쫓아냈기 때문이다. 1983년 4월, 메탈리카는 앨범 녹음을 위해 뉴욕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일부러 머스테인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LA로 가는 버스에 태워 보낸 것이다. 머스테인은 2009년 노르웨이 방송 『Lydverket』에 출연해 “그때 나는 매우 큰 상처를 입었다. 메탈리카 멤버들에게 경고도 없이 두 번의 기회도 없냐고 말했지만 그들은 ‘너는 이제 떠났다’고 말할 뿐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다혈질이었던 머스테인과 메탈리카 멤버들 간 충돌이 잦았던 것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머스테인은 평소 알콜 중독 수준으로 술을 마셔댔고 마약에도 손을 댔다. 물론 그 시대 음악가들이 마약을 하는 건 일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머스테인은 그 정도가 심했다. 그럼에도 경고 한번 없이 바로 추방하는 건 머스테인 입장에서 억울할 일이기는 했다. 충격을 받은 머스테인은 LA에 있는 고향 집으로 돌아와 세션맨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다.  

   머스테인은 메탈리카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음악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메탈리카에 대한 복수심으로 새로운 밴드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메탈리카보다 뛰어난 밴드를 만드는 게 그의 목표였다. 하늘이 도운 것인지 천운이 따른 것인지 마침 머스테인이 살던 아파트 아랫집에는 실력 있는 베이시스트 데이브 엘렙슨이 살고 있었다.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던 머스테인과 달리 엘렙슨은 베이스의 여러 기법을 익혔고 작곡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머스테인과 엘렙슨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밴드를 제안했고, 곧 이어 기타리스트 그렉 핸드빗과 드러머 디온 캐러더스를 영입해 메가데스라는 밴드를 조직했다.   

   메가데스 역사를 살펴보면 머스테인과 엘렙슨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수시로 교체됐다. 엘렙슨도 2002년 메가데스를 탈퇴했다가 2010년 재합류한 바 있다. 메가데스를 거쳐 간 멤버들 중에는 기타리스트 크리스 폴랜드와 마티 프리드먼, 드러머 닉 멘자 등 거물급 연주가들도 적지 않았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메가데스는 최정상급 연주가들이 모였음에도 철저히 머스테인 주도로 움직이는 밴드였던 것이다.  

 
 

   여하튼 1985년 메가데스는 우여곡절 끝에 첫 앨범 《Killing Is My Business… and Business Is Good!》을 발매했다. 그러나 빌보드 차트 169위로 딱히 대단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고, 음악적으로 이렇다 할 호평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반면 메탈리카가 1986년 3월 발매한 앨범 《Master of Puppets》는 역대급 인기를 얻으면서 승승장구했다. 이전까지 메탈리카 음악에는 머스테인이 평소 사용했던 기타 리프가 들어가곤 했지만 《Master of Puppets》에는 머스테인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러고도 큰 인기를 얻었으니 머스테인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타도 메탈리카를 외치던 메가데스는 음악적 차별화를 두기 위해 펑크를 적극적으로 접목시켰고, 사회문제를 담은 가사로 확실한 자기 색깔을 보였다. 갖은 노력 끝에 메가데스가 1986년 9월 발매한 앨범 《Peace Sells… but Who's Buying?》은 미국 내에서만 1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등 나름대로 훌륭한 성적을 거뒀다. 메가데스는 무너진 UN 빌딩을 앨범 커버로 장식했고, 온갖 냉소적인 내용으로 가사를 적으면서 비평가들에게 의미 있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Peace Sells>는 오늘날까지도 평화를 상징하는 메탈 곡으로 꼽힌다. 1986년 10월에는 슬레이어의 명반 《Reign in Blood》까지 나오면서 스래시 메탈 팬들에게 1986년은 잊지 못할 해가 됐다.  

 
 

  ‘내가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말해줘. 그건 여전히 백악관이야. 그렇지? 새로운 길이 있다면 내가 가장 먼저 갈 거야. 하지만 지금은 일을 하는 게 나을 거야. 너는 평화에 가격을 매길 수 있니?’ - <Peace Sells>  

 
 

   《Peace Sells… but Who's Buying?》로 성공을 거둔 메가데스는 곧바로 다음 앨범 작업에 착수해 1988년 앨범 《So Far, So Good… So What!》을 발매했다. 머스테인은 앨범 곡 대부분을 작곡한 건 물론이고 프로듀싱까지 맡으면서 앨범 제작을 주도했다. 이 때문인지 앨범은 머스테인의 개인적 경험과 사상이 진하게 녹아있다. 일례로 <In My Darkest Hour>는 1986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메탈리카 베이시스트 클리프 버튼 추모곡이고, <Liar>는 메가데스를 탈퇴한 폴랜드를 비판하는 곡이다. 당시 폴랜드는 마약 구매를 위해 메가데스의 장비를 빼돌려 팔아먹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섹스피스톨즈의 인기곡 <Anarchy in the U.K.>를 커버하기도 했다. <Anarchy in the U.K.>는 영국 정부를 비판하면서 아나키스트를 추구하는 곡으로 영국 펑크의 상징으로 꼽힌다. 메가데스도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컸지만 미국 밴드인 메가데스가 영국을 굳이 비판할 이유는 없었다. 이에 U.K. 부분을 U.S.A.로 가사를 바꿔 불러 미국 시장을 겨냥했지만 원곡이 영국이었던 탓인지 곡의 인기는 영국에서 더 높은 편이었다.  

   머스테인의 사상이 드러난 또 다른 곡은 <Set the World Afire>다. 1980년대 후반 공산권 국가들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미국과 소련의 양강구도가 깨지기 전이었다. 두 국가는 핵개발 경쟁에 한창이었고,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핵전쟁이 일어날게 뻔한 상황이었다. 머스테인은 <Set the World Afire>를 통해 핵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주려 했다. 《So Far, So Good… So What!》의 앨범 커버도 해골이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있는 전쟁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었다. 여담으로 <Set the World Afire>의 가사는 머스테인이 메탈리카에서 해고된 날 울면서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전성기 메가데스의 앨범에는 평화를 외치는 곡이 적어도 한 개 이상 있었다. 그만큼 머스테인은 평화를 중요시하는 인물이었고, 때로는 이를 의무로 받아들였다. 머스테인은 1986년 10월 『Los Angeles Times』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나는 판에 박힌 멍청한 헤비메탈 키즈가 아니다. 밴드는 음악에만 몰두하지 말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빨간 불빛과 구름이 아침 하늘을 숨 막히게 하고 있어. 그들은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지. 모든 형태의 생명은 죽었어. 사람들은 모두 굴복했어. 끝이 다가오고 있어. 죽을 준비 해.’ - <Set the World Afire>  

 
 

   《So Far, So Good… So What!》은 전작 《Peace Sells… but Who's Buying?》 못지않은 판매량과 인기를 얻었다. 몸값이 높아진 메가데스는 1988년 8월 영국 『Monsters of Rock』 페스티벌 무대에 오르는 등 메탈리카의 아류밴드에서 메탈리카의 자리를 위협하는 밴드로 성장했다. 1988년 메가데스와 함께 『Monsters of Rock』에 참여한 음악가를 살펴보면 건스 앤 로지스, 키스, 아이언 메이든, 데이비드 리 로스 등 세계적인 메탈 음악가들이었다.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머스테인의 평화 메시지도 더욱 빛을 보였다. 1988년, 메가데스의 북아일랜드 공연에서 머스테인은 돌연 “아일랜드를 아일랜드인들에게 돌려주라. 이번 곡은 The Cause에게 바친다”고 말했다. The Cause는 아일랜드 무장 단체 IRA를 뜻하는 단어였다. 관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지만 메가데스는 주저하지 않고 <Anarchy in the U.K.>를 연주했다. 머스테인은 훗날 술에 취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고 밝혔지만 이유야 어쨌든 공연 다음날 온갖 협박을 받아야 했다.   

 
 

   메가데스의 1990년 앨범 《Rust in Peace》는 머스테인의 사상, 개인사, 고뇌 등을 담아내면서 말 그대로 머스테인의 모든 것을 표현했다. 일례로 <Rust in Peace… Polaris> <Take No Prisoners> <Holy Wars… The Punishment Due> 등은 전쟁에 대한 참상을 표현한 곡들이다. 그런가 하면 <Dawn Patrol>처럼 환경오염을 경고하는 곡도 있었다. 머스테인은 <Dawn Patrol>에서 “온실효과로 인해 환경이 망가지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웃는 것뿐이다. 마치 우리의 묘비명을 읽듯”이라고 경고했다.  

   <Hangar 18>은 외계인을 다룬 다소 엉뚱한 곡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외계인 존재 가능성에 대해 크고 작은 토론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 정보기관에서 외계인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돌았다. <Hangar 18>은 바로 이 음모론을 다뤘는데 그간 머스테인이 보여준 행동이나 성향으로 봐서는 뜬금없는 곡이었다.   

   곡의 내용이야 어떻든 <Hangar 18> 뮤직비디오는 매우 훌륭한 평가를 받았다. 비밀기지 안에서 외계인과 지구인이 각종 연구를 하는 모습과 메가데스의 연주 장면을 조화롭게 배치한 게 특징이다. <Hangar 18>은 1991년 싱글로 발매된 후 1992년 그래미상 최고의 메탈 퍼포먼스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아쉽게도 메탈리카에 밀려 수상에는 실패했다.  

   사회적으로는 북아일랜드를 다룬 곡 <Holy Wars… The Punishment Due>가 반항을 일으켰다. 1988년 북아일랜드 공연에서 알 수 있듯 머스테인은 이전부터 북아일랜드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스래시 메탈이 기본적으로 저항 정신이 부각되는 장르긴 하지만 《Rust in Peace》 덕에 메가데스는 그 중에서도 돋보이는 음악가가 될 수 있었다.   

 
 

   이어진 앨범 《Countdown to Extinction》과 《Youthanasia》도 핵전쟁, 환경오염 문제, 동물보호 등을 다루면서 메가데스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Countdown to Extinction>은 미국동물애호협회(HSUS)로부터 도리스 데이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메탈 음악가도 포크 음악가나 펑크 음악가처럼 얼마든지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특정 마니아가 즐겼던 스래시 메탈이 일반 대중들에게 환호를 받기 시작한 것도 메가데스가 인기를 얻은 후부터다. 《Countdown to Extinction》은 빌보드 차트 2위, 《Youthanasia》은 4위에 오르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다만 스래시 메탈 팬들 사이에서는 《Rust in Peace》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곤 한다.   

   1990년대 초중반은 메가데스에게 있어 영광의 시간이었겠지만 인기는 거품이라고 했던가. 1990년대 후반 들어 메가데스와 머스테인의 존재감은 약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메가데스는 오즈페스트, 우드스탁 '99 등 유명 축제 단골손님이었고, 메탈계에서 그 영향력이 작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중음악의 주류가 일렉트로니카, 힙합 등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메가데스의 힘만으로는 메탈의 인기를 회복하기 쉽지 않았다.  

   사실 떨어진 인기는 다시 회복할 수도 있다. 진짜 문제는 머스테인의 건강이었다. 2002년 초부터 왼팔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신경 마비 증상이 머스테인에게 온 것이다. 그는 기타 연주는 물론 일상생활에도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다. 머스테인은 재활 치료에 들어갔지만 밴드를 지속할 수는 없었기에 2002년 3월 메가데스는 잠정 해체했다.  

   다행히 머스테인은 재활 치료를 무사히 끝내 2004년 메가데스를 재결성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엘렙슨이 메가데스의 합류를 거부했다. 그간 메가데스에서 수많은 멤버 교체가 있었지만 엘렙슨은 원년멤버로서 메가데스를 떠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 메가데스 합류를 거부한 게 아니라 수익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머스테인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소송은 2005년 기각됐지만 둘의 사이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됐다. 악재가 이어진 와중에도 메가데스의 2007년 앨범 《United Abominations》와 2009년 앨범 《Endgame》가 모두 빌보드 10위 안에 진입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2010년에는 엘렙슨이 머스테인과 극적으로 화해해 메가데스에 재합류했다. 두 사람을 중재한 사람은 당시 메가데스 드러머 숀 드러버였다. 엘렙슨은 여러 밴드를 돌아다녔지만 이전과 같은 인기를 얻지는 못한 상태였다. 마침 메가데스 베이시스트 제임스 로멘조가 탈퇴 의사를 밝혔던 때라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엘렙슨의 합류 후 메가데스는 《Thirteen》 《Super Collider》 등의 앨범을 발매하며 왕년의 인기로 먹고사는 밴드가 아님을 보여줬다.  

 
 

   2010년대 머스테인은 음악적뿐 아니라 사회적 이슈대상이기도 했다. 전쟁을 반대했던 머스테인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비판 대열에 합류하면서 일종의 전향을 한 것이다. 물론 오바마 전 대통령도 비판 받을 부분이 적지 않고 사상의 자유도 존중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1980년대 전쟁을 일으킨 쪽은 주로 공화당 진영이었고, 대다수 음악가들이 오바마를 지지했던 점을 생각하면 특이한 일이기는 했다.  

   머스테인은 2011년 호주 라디오에 출연해 “오바마는 지금까지 본 대통령 중 가장 분열을 초래하는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2012년 3월에는 캐나다 TV 프로그램 『George Stroumboulopoulos Tonight』에 출연해 “오바마는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아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다소 황당한 음모론을 제기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는 비교적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머스테인은 2016년 동영상 스트리밍 앱 페리스코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트럼프의 팬이라고? 글쎄. 그는 매우 성공한 사업가다. 그에게 투표할 거냐고? 그건 당신이 알 바는 아니잖아. 내가 투표 하더라도 말하지 않을 거야. 그를 뽑지 않더라도 말하지 않을 거고. 하나는 말해주지. 난 힐러리는 뽑지 않을 거야. 나는 래틀헤드(메가데스의 마스코트)를 뽑을 거야”  

 
 

   당연히 파장이 작지 않았다. 머스테인은 트위터를 통해 “난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한 적이 없다”고 한 발짝 물러났지만 팬들은 머스테인의 트럼프 지지를 기정사실화 했다. 따지고 보면 머스테인은 공화당과 민주당 중 한 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본인의 소신을 보였을 뿐이기에 비판 받을 이유가 없다.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른 머스테인이지만 평화를 위해 외친 그의 목소리까지 폄훼되는 것은 부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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