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을 계약한 뒤에도,
우리는 곧바로 무언가를 채워 넣지 않았다.
텅 빈 사각형 공간을 오래 바라보며,
무엇을 담을지 조용히 생각했다.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찼다.
소중한 곳이니만큼,
하나하나 정성껏 고르고 싶었다.
처음으로 들인 건
캠핑용 테이블과 의자였다.
그 위에 앉아 바라본 공간은
아직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미 마음은 채워진 것처럼 따뜻했다.
유리창 너머로 나무가 흔들렸다.
23년 10월의 바람은 부쩍 차가웠다.
빛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창가 자리에서 책을 읽다 고개를 들면
초록빛이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절의 흐름을 책방 안에서도 느낄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앉는 사람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창가 쪽에는
테이블을 꼭 두기로 했다.
공간의 구도를 잡기 위해
우리는 마스킹 테이프로
책장과 테이블, 카운터의 자리를 나누었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으면 했다.
함께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
책은 혼자 읽는 것이기도 하지만,
함께 읽을 때
조금 더 오래 남는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분위기는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하얀 형광등, 차가운 샤시, 텅 빈 벽.
책방이라기보다는
학교 같고, 창고 같았다.
공간이 소중한 만큼
우리는 몇 군데 인테리어 상담도 받아보았다.
하지만 곧 알게 됐다.
지금 우리가 가진 예산으로는
무리가 된다는 걸.
무엇을 가장 먼저 들여야 할지
다시 생각했다.
그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책이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것만
전문가의 손을 빌리고,
나머지는 우리의 손으로
하나씩 채워가기로 했다.
방수 페인트,
창고용 가벽 시공 외에는
모두 스스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바꾸고 싶었던 건 조명이었다.
형광등의 하얀빛은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았다.
따뜻하고,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빛.
그런 조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고른 건
레일 조명과 창가 포인트 조명,
그리고 오래 고민 끝에 고른 작은 샹들리에.
하나둘 도착한 조명들의 포장을
마치 선물처럼 조심스레 풀었다.
남편은 천천히 자리를 확인하고,
사다리에 올라
하나씩 조명을 달기 시작했다.
조명 작업은
해가 있는 동안에만 가능했다.
선을 잇고, 불을 꺼야 하니까.
드디어 모든 조명이 완성된 저녁,
우리는 말없이 마주 섰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주황빛이 천천히 벽과 천장을 타고 번졌다.
아무것도 없던 흰 벽이
조심스럽게 물들어갔다.
그저 차가운 공간이었던 책방이
그날, 처음으로
따뜻한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나는 말을 잊은 채
천천히 그 빛을 따라 천천히 눈을 돌렸다.
이상하게도,
마음 깊은 곳에서도
아주 작고 따뜻한 불빛 하나가
켜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설렘 같기도 하고,
안도 같기도 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우리는 동시에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하고 느꼈다.
그날 이후,
이 공간은 아주 천천히
우리의 빛을 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