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다
나는 지금 옥상에 서있다. 단풍도 채 들지 않은 가을인데 겨울 같은 바람이 분다.
잡고 있는 난간에 미세한 먼지와 물기가 느껴진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쇠의 냉기가 손바닥에 달라붙는다. 운동화 끈을 동여맨 발등을 내려다본다. 한 발만 내딛으면 된다. 오른발을 내딛는 발 너머로 주차된 차들이 보인다. 이대로 난간을 놓은 채 다른 왼발만 내딛으면 나는 주차된 차 위로 떨어질 것이다. 두 눈을 감아본다. 드라마에서처럼 시끄러운 차 소음은 들리지 않는다. 오후 2시에 우리 집 아파트는 고요하다. 아이의 울음도, 다니는 사람도 없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눈에 스친다. 눈이 따갑다. 눈물이 흐른다.
지금 이렇게 죽으면 끝인가...?
그냥 죽으면 억울하니까.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건, 죽기 전 나의 마지막 이야기이다.
세상에 하는 쓰레기 같은 이야기이다.
아니 어쩌면 살고 싶었던 처절한 몸부림이다.
이렇게 뛰어내리고 끝낼 수는 없다. 나한테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적고 죽어야겠다.
내가 세상과 작별하는 날은 모든 것을 기록한 다음이 될 것이다.
20XX 11/4 (화)
웃기는 일이다. 죽기로 생각한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니 말이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 상념들을 낱낱이 적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없을 것만 같다. 내가 하는 말은 가 닿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전달하는 일이 가능이나 할까? 내가 쓰는 우울은 네가 쓰는 우울과 다른 말이다. 내가 쓰는 불안은 네가 쓰는 불안과 다른 말이다. 그러니 내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나마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고압적인 누군가에게 제지당하지 않고 온전히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텍스트다. 그러니까 쓰겠다. 내 이야기를 모두 쓸 때까지는 살아있겠다.
난 오늘 죽기로 했었다. 죽기로 결심하고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죽는 장소다. 번화가로 가고 싶지 않다. 주차도 신경 쓰이고 사람들 많은 곳에 가면 숨이 막히니까. 어차피 죽을 거지만, 죽으러 가는 길까지 고통스럽게 가고 싶지 않다. 죽어서 구천을 떠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난 우리 집에서 죽고 싶다.
죽은 후의 내 모습도 가족이 먼저 발견하길 바란다. 반려견과, 남편이 내 마지막 순간을 보고 슬퍼하길 바란다. 상처받길 바란다. 그래야 나를 오래 기억할 테니까. 내 아픔을 알아주길, 기억해 주길 바란다. 죽을 장소를 우리 집 옥상으로 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하다. 이 일기가 완성되면 언제라도 뛰어내릴 것이다.
벌써 새 속옷을 사지 않은지 몇 년이 지났다. 레이스가 달린 브래지어는 보풀이 밥풀처럼 튀어나와 있고, 심리스 브래지어는 옆면이 뜯어져 있다. 팬티는 밴드 부분에 실밥이 나와있고 색이 바래있다. 뛰어내리면 피에 물들어 있겠지만 보풀이 있는 속옷을 입고 죽고 싶지 않다. 급하게 가장 깨끗하고 심플한 무늬 없는 베이지색 속옷을 주문한다. 깨끗한 차림으로 죽고 싶다. 제일 먼저 내 시체를 보게 될 사람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이런 내가 어이없어서 피식하고 웃음이 난다. 떨어지면서 신발은 벗겨지게 되는 걸까? 맨발로 죽은 귀신이 되고 싶지 않아서 신발끈을 단단히 조여 맸다. 롱원피스를 좋아하지만 떨어지면서 치마가 뒤로 뒤집혀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팬티를 보이고 싶진 않다. 바지로 입어야겠다. 제일 좋아하는 위아래 셋업으로 입어본다.
이제 문밖으로 나가려는데 반려견 짱아와 눈이 마주친다.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신발장 있는 곳까지 나를 따라 나와 내 신발 냄새를 맡는다. 종종 신문에서 반려견과 함께 투신이라는 뉴스에 사람들은 모두 손끝으로 칼을 꽂았다. ‘죽으려면 지 혼자 죽지’ , ‘반려견은 무슨 죄냐’ , ‘죽을힘을 다해서 살지’ , ‘진짜 힘든 사람은 안 죽음, 멘탈 존나 약함’. 일면식 없는 사람의 죽음과 그 밑에 텍스트를 보며 이상한 무력감을 느낀다. 내가 죽으면 무슨 이야기가 달릴까? 어쨌든 오늘은 아니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