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람 4화 - 돌고 도는 것들
20XX 11/09(일)
발버둥 칠수록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진흙탕. 몸을 움직일수록 더 깊이 잠기고 숨은 턱밑까지 차오른다. 빠져나올 길이 없는데, 그럼에도 나는 자꾸 발을 구른다. 이 지긋지긋한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뭐가 좋을까. 로또에 당첨되거나, 내가 성공하는 길 정도일까? 부족한 내 머리로는 이 두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난 2000년대에 살아가고 있지만 <모순>의 안진진처럼 삶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줄 남자를 기다린다.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우리 아빠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하늘의 별따기다.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애초에 어려운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어 잘 산다는 기사를 본 기억은 거의 없다. 될놈될(될 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된다)이라고 어차피 어느 정도 사는 중산층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어 상류층으로 올라간 적은 있겠지만 나 같은 하층민이 중산층이 되는 건 정말 절망적일 정도로 희박한 일이다.
아빠는 구렁텅이를 벗어날 희망으로 로또를 믿었다. 그래서 매주 질리지도 않고 로또를 샀다. 하얗고 빨간 로또종이를 보고 엄마는 손사래를 쳤다.
"그놈의 로또, 되지도 않는 거, 그 돈 모았으면 집이라도 샀겠네." 라고 미간의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면,
"저놈의 여편네가 말이라도 좋게 하는 법이 없어." 하고는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가버리는 레퍼토리다.
수년간 로또를 사면서 아빠는 나름의 공식이 생겼다. 바로 본인 꿈에 의한 꿈풀이인데, 대략 이런 식이다. ‘누가 죽었으면 4’ , ‘이사 가는 꿈을 꾸면 이동을 한다는 뜻이니까 25’ ‘유명한 사람이 나오면 일인자니까 1’이나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잔잔하게 맞추고 소소하게 당첨된 5천 원으로는 다시 로또 종이로 바꾼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로또 꿈풀이를 해주다가 엄한 사람이 2등에 당첨이 된 사건이 생겼다. 우스운 게, 그 사람은 버젓이 자신의 건물 1층에서 슈퍼를 하고 있는 말그대로 건물주인 중산층 사람이었다. 나는 그럼 그렇지, 역시 될놈될이네, 죽 쒀서 개 준다고 생각하던 차에, 아빠의 눈에는 희망이라는 반짝이는 빛이 일어났다. 그 이후로 아빠는 더욱 자신의 꿈을 맹신 하기 시작했다. 일어나자마자 씻지도 않고 달력을 찢은 뒤편에 그날 밤 꾼 꿈내용과 그 주에 나온 숫자를 매칭하며 자신만의 꿈해몽 사전을 완성해 나갔다. 마치 성경이나 불경을 필사하듯, 꿈과 숫자를 적어 내려갔다. 사전이 두툼해질수록 엄마와의 불화도 점차 늘어났는데, 마침내 엄마는 결단을 내린 것 같았다.
수많은 로또 종이와 달력 뒤에 쓰인 꿈해몽을 아빠 몰래 몽땅 다 버린 것이다. 아빠는 평상시 무능력하긴 해도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인데 처음으로 지옥의 불사자 같은 얼굴을 하고는 엄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 이마에 삼자주름을 더 깊게 지은채, 마른나무가 부러지는 듯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하여간 너는, 평생에 도움이 안돼. 그거를 말도 없이 버리냐."
엄마는 조금도 주춤하지도 않고 맞받아쳤다.
"옛날에 그렇게 화토판에 가서 기웃거리더니 이제 로또냐? 그거 할 시간에 나가서 돈을 벌어, 이 사람아"
나는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아닌 어엿한 성인이지만 그 소리를 그냥 잠자코 듣고만 있다. 그 세계는 나와 다른 세계라는 듯, 그들과 나는 다른 삶을 살 거라는 듯 내 방에서 꼼짝없이 누워서 핸드폰으로 엄지손가락만 튕길 뿐이다. 그러던 아빠가 일을 냈다. 로또 3등에 된 것이다. 숫자 한 개를 잘 못써서 3등이 됐다고 무척이나 아쉬워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해사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어쩐지 그런 아빠가 처음으로 아이 같고 안쓰러워 보였는데 엄마는 다 버린 달력종이가 미안한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적더라도 좀 달력 종이 뜯어서 여기저기 흩어놓지 말고, 종이에 조금만 적던가 해야지."
아빠가 로또 3등으로 받은 돈은 200만 원 정도였는데 그 돈은 중산층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어서 우리는 오랫동안 덜덜거리며 잘 돌아가지 않던 통돌이 세탁기를 조금 최신형 통돌이 세탁기로 바꾸는데 썼다. 근래에 본 얼굴 중 가장 맑은 미소로 엄마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드디어 세탁기 바꿨네. 이거 나온 지 얼마 안 된 거래. 드럼세탁기는 비싸기만 하고 빨래가 깨끗이 안 빨린다고 내가 말하니까. 하이마트 직원이 나한테 너무 똑똑하다는 거야 " 하면서 마구 웃었다.
나는 새로운 세탁기가 돌아가는 특유의 통돌이 소리를 듣는 게 짜증 났다. 같은 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소리가 마치 내 인생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세탁기를 돌리며 흥얼거리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모두 드럼세탁기 사. 통돌이 세탁기 요즘 누가 써? 영업사원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지, 그럼 돈 없어 보이는 사람한테 요즘 통돌이 세탁기는 잘 만들지도 않는 추세예요.라고 말할 수 없잖아? 엄마는 그것도 몰라서 그래? 좀 더 보태서 그냥 드럼세탁기를 사. 남들 하는 것 좀 해’라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마치 내 인생 같아서, 짜증 나니까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난 지성인이니까.
수년 간 로또를 사고 꿈해몽 사전까지 만든 노력이 200만 원이라니. 누군가는 신입사원 월급으로 받는 돈이고, 누군가는 성과상여금으로 받는 돈 아닌가. 기가 찼다. 내 삶은 언제까지 이렇게 구질구질해야 하나.
냉장고는 분명 하얀색이었을 텐데 누렁니 같고, 싱크대는 여기저기 칠이 벗겨 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기 힘든 건 난 언제까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내려가는 계단을 밟아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빨래가 돌아가는 통돌이 세탁기 소리를 듣다가, 창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 인생도 이렇게 통돌이처럼 제자리만 돌다가 멈춘다면, 업그레이드한 게 고작 새로운 통돌이라면 난 죽고 말 거라고. 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즈음에 난 처음으로 첫사랑을 하게 된다.
183센티의 키에, 이진욱을 닮은, 능력 있는 회사 선배였던 그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