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람 5화 - 한 걸음 옆
우리 회사 대부분의 여자들이 진욱 선배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호감이 깃들어있다. 누군가 직접적으로 진욱선배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런 것은 언제나 느껴지는 법이다. 말할 때의 몸짓과 눈빛, 태도에서 그 사람을 향해 흘러넘치고 있는 그것은 본인보다 제삼자가 더 잘 느끼는 법이니까.
곧 대리로 진급할 그는 배우 이진욱을 닮았는데 심지어 이름도 심진욱이라서, 본인스스로나 남들이
“어머 배우 이진욱 씨 닮았어요”라고 하지 않더라도 그 배우의 후광을 보너스로 지고 다니는 샘이었다. 서글서글한 성격이었다면 수려한 외모에 바람둥이처럼 보였겠지만 그는 과묵했고 한 번씩 웃기지도 않는 이상한 아재개그를 던지는 허당미가 있어서 오히려 안전한 미남 같이 느껴졌다. 그의 썰렁한 개그와 수려한 외모가 대비될수록 여자들은 그에게 말 붙일 기회를 노렸는데 그게 참 쉽지 않았다. 워낙 과묵한 데다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질 않으니 좀처럼 그와 친해질 찬스를 얻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어쩌다 말을 붙이면 사무실내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바로 공공의 적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만인의 연인으로 두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이 기분이 좋았는지 법카를 건네며, 외부 커피를 사 오라고 했다. 언제나처럼 막내인 내가 커피를 사러 가야겠다 싶어 주문을 받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진욱선배가 같이 가겠다고 했다. 일순간 사무실에서 번뜩이는 질투의 눈빛이 내게 날아와 꽂혔다. 나는 모두의 이목을 받는 것과 여자들의 미움을 사는 것이 걱정이 되어 괜찮다고 말했지만, 팀장이란 사람이 갑자기 착한 사람으로 변하더니, 혼자 들고 오기 힘드니 같이 가도 좋다고 말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커피숍은 같이 걸어가는 내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옆에 있는 진욱선배가 신경 쓰여서 자꾸만 침이 고였다. 내 몸 안에 침이 이렇게 많이 생성되는지 처음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왜 이렇게 큰지, 내 침 삼키는 소리를 그도 들었을지, 후배인 내가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 건지, 지금쯤 사무실 여자들은 무슨 뒷담을 하고 있을지, 온갖 생각으로 너무나 머리가 복잡했다. 걸을 때 마자 슬쩍슬쩍 닿는 그의 팔도 신경 쓰였다. 키가 작은 편인 나는 그에게 보폭을 맞추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큰 키에도 보폭이 크지 않아서 나를 배려해 주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하나씩 신경 쓰면서 옆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물었다.
“보람 씨, 힘든 거 없어요?”
회사 출근 하고 퇴근할 때 '안녕하세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하는 인사만 나눈 게 다였는데 갑자기 이런 걸 물어보니까 당황스러웠다. 일단 본인도 어색해서 물어본 건지, 아니면 곧 다른 지사로 가니까 후배를 위해 무언가를 해결하고 가려고 묻는 것인지 의중을 알 수 없어 더욱 난감했다.
“네.. 없어요” 나는 웃으며 그냥 없다고 말했다.
“보람 씨, 이 근처 말고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맛있는 커피집이 있는데 거기로 가서 사갈까요? 회사사람들도 종종 거기 가서 사 먹어요.”
“아, 네...”
바로 앞에 커피숍을 두고 저쪽으로 조금만 더 가자는 혜밤커피집은 걸어서 15분이나 가야 했다.
점심시간 직후라 손님도 많아서 우리는 커피를 사는데만 30분이 걸렸고, 오고 가고 왕복 30분을 더해 1시간이나 지나 회사로 돌아왔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어’라는 진부한 말 따위 하고 싶지 않지만 정말 그랬다. 1시간이나 걸렸는지 몰랐을 만큼 진욱선배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특유의 주름진 눈웃음을 보는 것이, 직장동료지만 옆에 나란히 걷는 것이. 그와 함께 있다는 자체가 그냥 좋았다. 그런 내 마음과는 달리, 회사에 도착해서 들어간 사무실 분위기는 얼음이 얼기 직전의 차가운 냉기가 돌고 있었다. 진욱선배는 멋쩍어하며 말했다.
“제가 이제 곧 다른 곳으로 가잖아요. 팀장님이 멋지게 카드도 주셨는데, 다들 혜밤커피 좋아하니까 제가 대신 사 왔습니다. 여기 커피 생각날 것 같아서요,”
팀장은 족제비같은 눈매를 더욱 가늘게 뜨며 “아니 우리는 커피를 만들러 갔나 했네~ 둘이 왜 이렇게 늦게 있다 들어왔어? 우리 사내 연애 안되는 거 알지? 다른 지사로 가도 사내연애는 안되는 거야." 라고 못박았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같이 갔다 와도 된다고 말할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팀장이 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팀장 놈의 착함은 3초의 마법일 뿐, 불필요 없는 ‘사내연애’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서 가뜩이나 냉랭한 분위기를 아주 얼게 만들어 버렸다.
“아이참 팀장님~ 무슨 커피 사가지고 온 거 가지고 그렇게 까지 얘기하세요. 이제 진욱 대리도 곧 가는데, 혜밤 커피 다 같이 마시면 좋지. 솔직히 우리도 아까 마시고 싶었잖아요. 진욱 씨 고마워,”
은희선배는 특유의 눈웃음을 찡긋하며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어색하게 사온 커피를 팀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손끝이 미세하기 떨렸다. 커피를 나눠주면서 사람들의 눈빛의 온기를 파악했지만 진욱 선배 생각만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들의 눈빛이 읽혀지지 않았고, 조금 미움받는다고 해도 어쩐지 괜찮을 것 같았다. 어쩐지 승자가 된 것 같은 이 미묘한 승리감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회의 중 휴대폰 진동이 울려 테이블 밑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노란 불빛의 휴대폰에는 진욱선배에게 온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보람 씨, 있다 저녁에 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