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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사람 06화

死람 6화 - 오늘 저녁 뭐해요?

死람 6화 - 오늘 저녁 뭐해요?

by 예린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고 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누가 본 건 아닐까? 아니다. 메시지 확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보다 발신자의 이름을 봤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 것 일수 있다. 업무이야기를 주고받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업무 관련 내용은 보통 회사 메신저를 사용한다. 개인적으로 문자를 보낼 일은 거의 없으니 확실히 의심을 살만한 일이다. 휴대폰 한 번 울렸을 뿐인데 지루하던 오늘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인다.


잠깐만... 그런데 진욱선배가 왜 나한테 개인 메시지를 보냈지? 함께 커피를 사러 가면서 보낸 1시간이 좋으면서도 신경 쓰인다. 그냥 저녁에 뭐하는지 묻는 단순한 질문일 수도 있다. 괜히 김칫국 마시다가 쪽팔릴 일 만들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뱃속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마음이 일렁인다. 이런 내 모습이 너무 오랜만이라 설렘이라는 감정이 낯설기까지 느껴진다. 얼굴도 울긋불긋하다. 최대한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메모하는 척 회의에 참석했지만, 회의 내용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막내인 내가 들어봐야, 할 수 있는 일은 쥐꼬리만 한 일이라 못들어도 상관없겠지만.


내 자리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앉아 메신저를 껐다 켰다 했다. 메일도 몇 번이나 새로고침하고, 필요하지 않은 회사 공문을 읽었다가, 아까 메모조차 하지 않은 회사수첩을 괜히 펼쳐놓고 끄적였다. ‘문자 메시지......’, ‘오늘 저녁....’ 내가 회사에서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문자를 써 내려가는 내 손끝을 보며 한심함을 느껴 괜한 한숨을 쉰다. 누가 볼까 무서워져 얼른 볼펜으로 글씨의 흔적을 지웠다.


답은 해야 할 텐데.. 휴대폰 메시지 창을 열었다 닿았다 한다.

진욱선배 자리를 곁눈으로 힐끗거리니 그는 내게 문자 보낸 적이 없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타이핑을 치고 있다. 갈 사람이 무슨 일이 저리도 많은가? 아니면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건가? 이미지와 다르게 바람둥인가? 하.. 모르겠다. 어쨌든 빨리 답을 해서 이 문제를 마무리 짓고 싶다. 그래, ‘오늘 저녁에 뭐 하느냐’는 단순한 물음이잖아. 솔직하게 적자. 솔직하게.


[저, 아무것도 안 해요.]


아....? 이건 정말 재미없는 여자 같이 느껴진다. 메시지를 지우고 다시 쓴다.


[아, 저 오늘 친구랑 약속이 있어요]


음.....? 이건 바로 거절한다는 뜻처럼 느껴지지 않나? 도대체 뭐라고 보내야 적당히 멋지고 세련된 일상을 보내는 여자가 오늘만큼은 시간이 있다는 것을 어필할 수 있을까. 난 이 짧은 문자에도 많은 의미를 담고 싶어서 고민한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워서 웃음이 난다. 아니 근데 이게 어필해야 하는 물음의 문자가 맞긴 한 건가? 별거 아닌 문자에, 그냥 답장일 뿐인데, 난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하다가 드디어 전송버튼을 눌렀다.


[음... 왜요? 가시기 전 맛있는 것 사주시려고요?]


너무 들이댔나 싶었지만 나도 적당히 어필은 해야지. 그런데 물음표가 2개인게 신경이 쓰이긴 한다. 문자 전송을 보내고 나서 그의 자리를 또 힐끗 보았지만 문자를 확인하진 않는다.

나 혼자 답장을 어떻게 보낼지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 한 게 괜히 억울해서 의자를 소심하게 박차고 화장실로 갔다. 괜히 분노의 차인표 양치질만 5분을 했다. 이 정도면 스케일링이 됐을 정도였을 거다. 볼 안에 치약의 화한 맛이 맴돌았다. 괜히 물 묻은 칫솔을 힘주어 탁탁 털고 있는데 주머니 속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보람 씨, 같이 저녁 먹어요 :) 뭐 좋아해요?]


문자를 보는 순간 입안이 화해지고 세상이 환해졌다. 순간 빛의 일조량도, 내 기분의 온도도 올라가는 느낌이다. 양치질 깨끗하게 하길 잘했고, 아까 물음표 두 개 보낸 것도 어쩌면 잘한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목요일. 저녁으로 뭘 먹어야 하나. 왜 밥을 먹자고 했을까. 이런 고민만으로 시간은 더디게 갔다. 사무실 공기는 눅눅하고 시계 초침은 제자리에서 머뭇거린다. 퇴근시간 6시가 마치 6년처럼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좀 더 예쁘게 입고 나오는 건데 생각하며 파우치를 들고 또 화장실로 간다.


평소 가지고 다니는 자연스러운 인디핑크 립스틱을 바르고 그 위에 좀 더 밝은 핑크색 립스틱을 덧바른다. 립글로스 가지고 올걸.. 주로 매트한 립스틱을 즐겨 바르지만 어디선가 글로시한 립스틱이 더 예뻐 보인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거울을 보며 왼쪽 머리를 귀뒤로 넘겼다가 다시 내렸다가 반복하다가 괜히 한번씩 하고 웃어보았다. 거울 속 나는 회사 막내도, 하루 종일 불안 해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향해 설렘을 느끼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 것 같아 얼른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5시 59분이다. 퇴근 시간 1분 전..


[보람 씨, 강남역 뱅뱅사거리 앞에서 봐요. 거기는 회사 사람들 많이 없을 거예요.]


진욱 선배의 문자를 받고 나는 3년 같은 3분을 더 기다리다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하고 회사용 신발을 벗고 지하철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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