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람 3화 - 검은 해일
20XX 11/6(목)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인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두 눈을 계속 감고 있어도 잠이 오지 않으면 두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본다. 어둠에 시야가 익숙해지면 방안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릴 때는 불 꺼진 방안에 혼자 눈을 뜨고 있으면 주황색 동그라미들이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하루는 엄마에게 “주황색 동그라미가 날아다녀 “라고 말했더니 엄마는 내가 귀신이라도 보는 듯 여겼다. 내가 그런 소리를 할 때마다 방안에 불을 켜고 없다는 걸 확인시켜 주곤 했는데 나는 그 주황색 동그라미들의 움직임을 보는 게 좋았다. 그건 뭐였을까? 내게만 보이던 빛의 잔상.
어릴 때는 그 동그라미들을 천사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눈을 뜨고 바라보면 작은 동그라미들이 자고 있는 엄마 손에, 엄마의 볼에, 엄마의 머리에 앉았다가 위로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모두 같은 속도로 내려오지 않아서 동그라미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다른 동그라미에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주황색 같기도, 노란색 같기도 해서 야경 속에서 내리는 눈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눈을 뜨고 있어도 내 옆에서 자고 있는 짱아와 남편의 뒷모습만 보일 뿐 동그라미들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동그라미 찾기를 포기하고, 혼자 거실로 나와 1인용 소파 옆의 스탠드 조명을 켜고 앉는다.
밤의 고요함에 냉장고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며칠 전 올라갔던 아파트 옥상이 떠오르고, 나를 괴롭히는 무수히 많은 얼굴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가슴이 답답해서 한숨을 쉬어본다. 언제쯤이면 이 지옥 같은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슴이 답답하다.
숨을 길게 쉬어본다.
내 몸 주변으로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 같다.
더욱더 나를 누른다.
공기가 바위가 되어 나를 짓누르고 심장은 안쪽에서 돌처럼 굳어간다.
이대로 숨이 멈춰버릴 것 같다.
아마도 시작된 것 같다..
매번 이런 패턴이었으니 알 수 있다. 또.. 시작된 것이다.
검은 파도가 나를 덮쳐오는 듯한 공포가 밀려온다.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다. 나는 앉아있던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 냉장고 옆 구석진 틈 사이로 몸을 숨긴다. 검은 파도에서 도망가기라도 하듯이 그곳에 몸을 구겨 넣는다. 이곳에 댐이 있어 내가 안전하기라도 하다는 듯 최대한 벽사이로 밀착시킨다. 그리고 주저앉는다. 어쩔 때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기도 한다. 오늘은 벽 쪽으로 도망가는 것까지 성공했다. 차가운 벽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어본다.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정신을 차릴 수 있다. 호흡은 좀 전 보다 거칠어졌다. 제발 이대로 무사히 지나가기를..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해 본다. 아무 일 없기를.. 이 시간에 나 혼자가 아니기를, 숨이 쉬어지기를, 더 이상 괴롭지 않기를 계속 되뇐다. 제발.. 제발..이라고 계속 중얼거리면서 오른손으로 심장박동을 체크한다.
그러나 폐 속에 물이 차오르는 듯 가쁜 호흡이 시작되더니 나 혼자 사람 많은 터미널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마치 사람들이 50배속으로 내 곁을 지나치며 분주히 다닌다. 나는 사람들 틈에서 어지러워진다. 소리가 사라지고 숨이 파도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현기증이 나면서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다. 이대로 쓰러질 것만 같다. 속이 울렁거린다. 또다시 검은 해일이 거세게 나를 덮쳐온다. 파도가 나를 삼키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고 숨은 거의 쉬어지지 않는다. 괴로워서 오른손으로는 심장을 부여잡고 왼손으로는 벽을 긁는다.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쉰다. 공기가 부족해서 들이마시는 숨이 길어진다. 표현할 수 없는 공포와 다가오는 거대한 검은 해일에 숨도 못 쉬는 울음을 터트린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거위소리를 내며 꺽꺽 울고 무섭다는 말만 반복한다.
남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놀란 남편과 짱아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나는 거실 구석에 붙어 벽을 긁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베란다로 걸음을 옮긴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창문을 연다. 찬바람을 들이마셔보지만 검은 파도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사각형 틀 안에 갇힌 기분이 든다. 점점 더 내게 다가와서 더 이상 내가 서있을 곳이 없을 것 같다. 이대로 압사당할 것 같다.
그렇게 새벽이 지나간다. 아직 아무 일도 끝나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