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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장래 Mar 19. 2022

누가 수락산 밧줄을 끊었을까

믿음 가득한 사회를 꿈꾸며

이름에 ‘악’이 들어가는 산은 험한 산이라고들 한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수락산은 오르기 쉬운 산이다. 가볍게 동네 산 정도를 오르던 친구들과 내가 수락산에 가기로 마음을 모은 데에는 수락산이라는 이름이 한몫 했다.


등산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수락산이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수락산 기차바위까지도 익숙할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전자였다. 생소한 이름의 기차바위가 기억에 남았던 건 듣기만 해도 모양새가 상상되는 이름과 웅장한 풍채 덕도 있지만 뉴스 기사 때문이 컸다. “수락산 정상 가는 길 기차 바위 로프 6개가 ‘뚝’... 누가 끊었나.” 바위가 얼마나 크길래 로프가 6개나 있는지, 와중에 이걸 악의적으로 끊은 사람이 있다니. 여러모로 인상 깊은 기사였다.



대체 누가 왜 힘들게 산까지 올라와서 로프를 끊어놨을까. 수락산을 오르며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그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성인 여러 명이 잡아당겨도 끄떡없는 밧줄을 6개나 잘라놓았다. 한밤중에 절단기라도 들고 산에 오른 걸까. 범인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추측이 나왔다. 강릉 산불 테러범과 비슷한 이유이지 않겠냐는 의견이 많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울분에 차서 밧줄을 끊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복수를 왜 애꿎은 등산객에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일리가 있었다. 대화가 이렇게 마무리 되었으면 좋았겠으나 친구의 마지막 한마디가 상상력을 자극하고 말았다.     


“만약에 진짜 나쁜 놈이었잖아? 그럼 밧줄을 반만 끊어놨을 거야.”


충격적인 발상이었다. 머릿속에 자꾸만 그림이 그려졌다. 밧줄 위쪽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등산객이 숨만 붙어 있는 로프를 힘껏 잡아당긴다. 등산객이 중간쯤 올라갔을 때 마침내 로프는 끊어진다. 그는 그대로 바위 위를 구르기 시작한다...     



원래 산 중에서도 바위 산을 제일 좋아했다. 돌투성이인 언덕을 오르고 있자면 인생의 난관을 헤쳐나가는 느낌이 들어 뿌듯했다. 허벅지가 불타오르는 감각이나 밧줄을 잡아당기며 온몸을 쓸 때 생기는 성취감을 즐겼다. 하지만 상상 속 선량한 등산객이 죽고 나니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지금 잡아당기고 있는 이 밧줄은 튼튼할까? 확신할 수 없었다.


기차바위의 범인이 수락산의 다른 밧줄들은 놔뒀을까. 꼭 범죄가 아니더라도 지자체에서 제때 밧줄을 갈지 않으면 밧줄이 삭아서 위험하지 않나. 내가 매달려 있는 이 밧줄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었다. 물론 앞 사람이 멀쩡히 지나갔으니 나 역시도 무사할 확률이 훨씬 높다. 하지만 밧줄을 잡을 때마다 괜히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밧줄에 집착하다 보니 하산하고 나서도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집집마다 문 앞에 쌓여 있는 택배 상자가 낯설었고 가게 밖에 물건을 내놓은 편의점이 이상했다. 세상이 사회적 약속에 의지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음식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몰라 밖에서 밥을 먹기 주저할 것이다. 집에서 쉬면서도 벽에서 해로운 물질이 나오지는 않을지, 부실공사로 무너지는 건 아닐지 불안할 수도 있다. 자동차가 뒤로 가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스마트폰이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일도 가능하다. 불신이 가득한 사회는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믿음이 넘치는 사회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나는 스마트폰이 폭발할까 걱정하지도 식당에서 나온 음식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지도 않는다. 별 생각 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부실공사로 멀쩡한 빌라가 무너진다거나 옷에서 유독물질이 검출됐다거나 하는 기사를 접하는 날은 다르다. 로프를 누군가가 끊었다는 기사 하나로 등산이 조심스러워진 것처럼 평온하던 일상이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하루에 14건씩 신고된다는 불법촬영 문제는 삶을 아예 바꿔놓았다. 공공장소에서 바지를 내려야 할 때마다 천장부터 변기 근처를 한 번씩 훑어보는 일은 습관이 되었다. 여행을 가서 샤워를 할 때마다 내심 불안하고 빨리 씻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내 돈 내고 쓰면서 뭐하는 짓인가 싶어 억울하기까지 하다.     


믿음이 불신으로 변할 때 불안감은 쉽게 커진다. 그래서 사회적 약속을 저버린 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더욱 분노하는 게 아닐까. 생리대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된다거나, 배달음식 속 담배꽁초는 단순하게 사건 하나를 넘어서 우리의 일상을 흔든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삶에 의심을 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집에서 일어나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싶다. 다시 바위 산을 타는 묘미를 느끼고 싶다. 등산이 끝나고 사우나에 들러 아무렇지도 않게 벌거벗은 채 탕에 들어가 몸을 지지고 싶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교통사고나 성폭력 걱정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가 쉬고 싶다. 부디 우리의 삶이 평온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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