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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장래 Mar 21. 2022

눈물 많은 어른

어른은 울지 않는다. 무릎이 까졌다고 울지 않고, 숙제가 너무 많다고 울지 않는다. 내가 봐온 어른들은 그랬다. 교통사고가 났던 날, 갈비뼈가 부러진 채 피를 뚝뚝 흘리던 아빠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긴 했어도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다음날 병원으로 달려온 할머니도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울지는 않으셨다.

  

교통사고는 말 그대로 사고다. 하루에 600건의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그중에서도 음주운전 사고는 48건 일어나는데 우리 가족이 운 나쁘게 당첨됐을 뿐이다. 동의하지만 엄마의 상태를 보고 있자면 술 마신 남정네 무리 때문에 왜 우리 집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따지고 싶어진다. 중환자실에 있던 엄마는 관자놀이에 박혀 있는 쇠심부터 시작해 기괴하게 뻗어나가는 철골 구조물 때문에 프랑켄슈타인과 비슷해 보였다. 아마 핼러윈 분장 대회에 나갔다면 일등을 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위로에는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 같았다. 하나, 엄숙하지만 슬퍼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연다. 둘, 괜찮냐고 묻거나 잘될 거라고 희망적인 말을 건넨다. 여기에 성경 구절을 곁들이는 식의 변형은 있었지만 다들 위로의 법칙 두 가지는 꼭 지켰다. 나도 정해진 관습대로 대답했다. 첫째, 슬픈 눈을 하되 미소는 살짝 띨 것. 둘째, 걱정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할 것. 9살이었지만 모두가 원하는 위로 주고받기 형식이 있다는 정도는 알았다.


그런 점에서 둘째 이모는 이단아였다. 이모는 중환자실 복도에서 배웅 나온 나를 붙잡더니 우셨다. 내 앞에서 우는 어른은 처음이었다. 하는 말들도 남들과는 달랐다. 예설아 어떡해, 이걸 어떡해. 어떡하느냐는 말을 목이 메어서 제대로 완성시키지도 못하고 반복하셨다. 다 괜찮아질 것이고 엄마는 금방 나으실 것이라는 말만 들었지 이렇게 우울하게 미래를 점치는 말도 처음이었다. 이모가 나를 껴안고 있었으므로 흐느낄 때마다 몸이 떨리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모는 확실히 어른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가장 어른답지 못한 이모의 행동은 가장 위로가 되는 행동이었다. 이모의 눈물은 깨달음을 주었다. 이건 슬픈 일이 맞고 울어도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내가 요새 불안하고 두려워 하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말이 바람직할지언정 정답은 아니었던 것이다. 교통사고 이후 처음으로 엉엉 울었다. 복도에서 울면 엄마가 들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내려놓았다. 그날 이모에게 안겨 겁나는 마음, 슬펐던 마음을 모두 쏟아냈고, 그 일은 인생의 값진 교훈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사고 당시에는 함부로 슬퍼하거나 힘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가 병원에 있는 상황쯤은 씩씩하게 이겨내는 게 자식이 마땅히 할 일이라고 여겼다. 이모와 함께 눈물을 쏟아낸 그날 이후로는 달랐다. 힘든 것은 힘든 것이고, 슬픈 것은 슬픈 것이었다. 감정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매일 저녁 병원으로 전화해 좋았던 일들만 골라내 이야기하는 일은 지칠 때도 있었다. 예전 같으면 ‘엄마가 병원에서 혼자 외로운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난 정말 못됐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눈물사건 이후에는 그럴 수도 있음을 받아들였다. 내가 깍쟁이 불효자여서일수도 있겠지만, 뭐 어떻게 하겠나. 현실이 그런 것을.  




법적 성인이 되어 보니 인스턴트 음식처럼 느껴지는 위로를 건네던 어른들이 이해가 갔다. 걱정하는 마음이야 진심이지만 괜한 말을 했다가 상처를 주거나 오지랖으로 끝날까 두려웠다. 실수를 줄이려다 보면 결국 무난한 말들을 고르게 된다. 괜찮아, 잘될 거야. 이모가 전해준 최고의 위로를 남에게도 전하고 싶었으나 그건 말로 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힘들어도 되니까 지칠 때는 울기도 해보라고 말하면 건방지기만 할 뿐이다.


눈물 많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은 눈물에게 박하다. 눈물이 많은 사람은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슬퍼도 감정을 누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어른이라고 한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아픔에 가슴깊이 공감하고 마음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단단해져서 기꺼이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요즘도 가끔씩 이모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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