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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Sep 06. 2022

참호 일기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하였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하였다.

2013년 봄





"나는 커다란 컵 안의 물 한 방울이다."  
 -훌리오 코르타사르-



얼마 전, 제주 서예가 한곬 현병찬 선생이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 어릴 적 70년대만 하더라도 육지에 가면 제주 사람이라고 쉽게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괜히 쑥스럽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제주 사람이라고 하면 한 번 더 쳐다봐 줍니다. 시대가 바뀌었어요. "


좀 그런 것 같기는 하다. 제주에 살면 겪게 되는 기적이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30년 동안 연락 한번 없던 친구, 평생 전화 한번 없던 사촌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오는 것이 그것이다.   

어제 제주 이민 오고 2년을 기점으로 제주를 천국으로 여기는지, 지옥으로 여기는지 부류가 갈리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나는 제주를 천국이라 생각한다. 


제주를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첫째는 곶자왈(종가시나무) 때문이고 두 번째는 책 읽는 환경이다. 산에 올라 라면을 먹어본 사람은 안다. 산에서 라면을 먹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칠맛을..... 

비슷하게 제주에서 책을 읽으면 육지에서와는 다른 어떤 감칠맛이 추가된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함께 하는 책모임이 훌륭하다. 훌리오 코르타사르는 우리는 커다란 컵 안의 물 한 방울이라고 했다. 인다라의 구슬처럼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이 슬프면 모두 슬퍼지는 법이다. 

책을 함께 읽을 때도 우리는 이 공감의 느낌 안에서 고래가 된다. 책 읽는 사람과 함께 하면 그 교양과 배려를 함께 향유하여 증폭시키는 효율도 있다.  

물론 책을 읽는 모임에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배려할 줄도 모르고, 상식 없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심지어 그런 사람도 한 권의 책으로 본다. 악역을 맡은 이가 주인공인 그런 책이다. 삶의 주인공은 모두 선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제주에서의 책모임은 육지와 무엇이 다른가? 제주란 섬은 다채로운 사람들을 만나기에 최적의 장소다.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제주는 북적인다. 제주는 특별자치도가 아니라 팔도지자체다. (왜 팔도냐 하면 북한 출신 분도 정말 많이 산다.) 전국 곳곳에서 모여 온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제주도. 전국에서 매일 공급되는 신선한 사람들..... 


사람마다 분명 개성이 있을 텐데 도시에선 그 도시 사람만 보인다. 뭔가 한계를 느끼게 된다고 할까? 그런데 그런 그들이 제주에 오면 달라진다. 도시에서 억누르고 있던 정체성이 날개를 찾은 듯 활개 한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도시 책모임은 콩나물국 같은데, 제주 책모임은 해물탕 맛이 난다.   

온갖 신선한 재료로 만든 영양가 만점의 훌륭한 음식인 셈이다.


그런데 그 음식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또 술이다. 

이 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제주의 자연이다. 좌산우해(左山右海)의 풍경도 한 몫하지만 무엇보다, 2만 년의 숲을 품에 안은 채 천년의 세월 동안 숨을 고르고 있는 활화산이 아니던가? 


살아있다는 것이 나를 흥분시킨다. 

네가 살아있다는 것으로 인해 나는 취한다.  


나도 이 말 옆에 함께 누워 귀를 대고 누웠다



종종 나는 이 참호에 누워 한라산에 귀를 대고 그녀의 심장소리를 듣는 걸 즐긴다. 

“구궁궁 구궁, 구궁궁궁”


이어 조곤조곤 그녀에게 속삭인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했다. 

너의 허락을 구하진 못했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저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된다. 


언젠가 한 번쯤 이기적인 사랑을 해 보고 싶었다. 

늘 상대를 배려해야 하고, 날 싫어하게 될까 두려워하며 마음 살피는 사랑.... 

나는 이제 이런 가스스한 사랑에 지쳤다. 


지금의 이 사랑이 신탁의 운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칸트적이다. 

<너를 사랑하겠다. 이제부터 너를 사랑할 것이다. 이제부터 너를 사랑하기로 하였다.> 


아무튼 나는 나의 이 선언을 소중히 여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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