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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Sep 08. 2022

참호 일기

2011년 9월,  기적이 일어나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리나니.

2011년 9월.


드디어 준공을 앞두고 있다. 옥상에서 아내와 함께 삼겹살을 구우며 조촐한 파티를 했다.

노을도 함께 기뻐해 준다.

나는 옥상 풍경을 내려다보며 마당 저 앞에 종가시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상상을 했다.


옥상에서 춤을 추다


둘만의 오붓한 파티를 마친 다음 날, 옆집에서 연락이 왔다.

옆집은 서예를 하는 분으로 우리가 집을 올리자 때맞춰 갤러리 공사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갤러리 터에 살던 나무를 뽑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거다. 그래서 혹시 장비 비용을 댄다면 그 나무들을 가져가도 좋다는 연락이었다.


이 얼마나 오묘한 하늘의 생각인가?

굳이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세계인이 알고 있는 성경 문장이 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리나니.”


그리고 내가 쓰고 있는 성경 문구엔 이런 글도 있다.

"즐겨라. 기적이 일어나리니. ㅋ"


나는 산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에 잠겨 환호를 숨기며 승낙했다.

나무를 이전하는 날, 현장에 가보니 나무가 무려 다섯 그루였다.

(종가시나무 2그루, 후박나무 1그루, 팽나무 2그루)

특히 종가시는 5백 년 이상 세월을 견딘 흔적이 보인다.

이런 걸 두고 대박이라고 하지 않을까?


그러나 문제가 있다. 나무를 뽑은 지 며칠 되어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포클레인 기사는 다른 나무는 생명력이 강해서 희망이 있는데 팽나무는 살리기 힘들 거라고 얘기한다.

아무튼 나는 애정을 담아 물을 열심히 준다.


마당에 심은 종가시


(며칠 뒤)

결국 팽나무는 살리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종가시는 새 잎을 내고 있다.

나는 매일 종가시 나무 아래 앉아 책을 읽을 테지.

종가시의 나부시한 가지 끝에서 새 잎이 무럭무럭 속살을 내밀 때마다 나는 공짜로 그걸 구경할 테다.

그러면 종가시는 부끄럽다며 낙엽을 내리겠지.

낙엽이 살눈처럼 내리며 내 눈 위에 부등깃을 올린다.

그녀는 내 귀에 다가와 문문히 속삭인다.

그녀가 5백 년 동안 바라본 하늘과 별과 바람에 대한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황홀하다. 나는 그녀의 드러난 채발을 애만지며 내 목구멍으로 집어넣는다.

그렇게 하나가 된다.  


창문 앞이 아니라 이 나무 아래에서 죽을 수 있어 다행이다.

나의 죽음 시나리오는 날이 갈수록 나아지고 있다.


그나저나 약을 끊은 지 오래인데 너무 건강하다. 병원에 가봐야겠다.

(건강해서 병원을 가다니.... 나 같은 경우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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