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이지 유 Sep 16. 2022

참호 일기

2022. 7. 28  열두 해의 가을을 목전에 두고...

열두 해의 가을을 목전에 두고...


조금 있으면 열두 해의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

나는 열두 해나 제주에 살면서 무엇이 바뀌었을까? 얼마나 성장했을까?

오늘은 나에게 부끄러운 날이다.

 

나는 이런 새만 사랑했었다.


나는 새를 사랑한다.

심지어 어제 새벽꿈에서는 새들을 보살피는 신이 되었다.  

꿈속에서 온갖 종류의 새들을 보살피다 보니 새들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꿈을 꾸고서도 조금도 애정이 가지 않는 새가 있었으니 그 새는 지빠귀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원제 'To kill a Mockingbird'>에서 Mockingbird흉내 지빠귀다. 사람들이 재미로 쏴 죽이는 새, 지빠귀.

하퍼 리는 왜 책에서 지빠귀를 그런 대상으로 골랐을까?


지빠귀는  일단 시끄럽다. 아주 듣기 싫은 소리로 목청을 돋우며 자주 싸운다. 내가 좋아하는 새의 이미지와 너무 다른 모습이다. 심지어 영역 다투기로 만만치 않은 까치와도 싸운다. 자기보다 4배는 커 보이는 까마귀는 지빠귀의 영역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들끼리도 싸운다. 맨날 싸운다.


그러니 지빠귀 소리만 들리면 "또 저 녀석이군." 하며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조롱이가 길게 아름다운 목청을 돋으며 날아가면 그렇게 시끄럽게 굴던 지빠귀도 조용해진다. 그래서 나는 조롱이를 무척 기특해했다. 조롱이 같은 새가 우리 집에 둥지를 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빠귀에게 애정이 가지 않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외모다. 참 성깔 있게 생겼다. 그래서 생긴 대로 논다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다. 앵그리버드가 딱 지빠귀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머리 위에 쭈삣 날을 세운 깃하며 주둥아리와 깃털까지 침침하고 표독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빠귀는 이런 날씨를 닮았다.


우리는 대부분 아이 울음소리에 민감하다. 그래서 식당이나 버스에서 아이가 울면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를 쳐다보고 아이 부모도 민감해진다. 지빠귀 울음소리를 들을 때도 그렇다.


오늘 산책길에 만난 지빠귀는 내 마음을 그렇게 날 서게 만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했다. 언짢아진 나는 그만 돌을 들었다. 돌을 던져 지빠귀를 쫓고 싶었다. 지빠귀는커녕 나뭇가지 하나 제대로 맞힐 실력이 없지만 뭐 근처에만 던지면 알아서 도망가겠지 싶었다.


그리고 지빠귀를 조준했다. 하나, 둘, 셋!

막 돌을 던지려던 찰나, 세상이 멈춰 섰다.

지빠귀를 조준하지 않았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을 텐데 조준을 하면서 살펴보니 그 지빠귀 아래 지빠귀 둥지가 보였고, 마침 그 둥지를 털고 있는 뱀이 보였던 거다.


지빠귀는 새끼를 지키려고 울고 있었다.

나는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듯, 정말 한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러려고 새를 돌보는 신의 꿈을 꾸었을까?

평소 지빠귀가 그렇게 영역 지키기에 열심이었던 이유가 이거였을까? 자식을 잃은 마음으로 울다 보니 그런 노래를 부른 걸까? 어쩌면 지빠귀는 너무 만만 당함에 억울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곧이어 자기 갈 길을 유유히 떠나는 뱀의 뒷모습을 본다.

지빠귀도 잠시 빈 둥지를 살피더니 크게 울면서 이웃 숲으로 날아갔다.

모든 사물은 나름의 확실한 이유를 들고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내 정원의 지빠귀가 문득 궁금해진다. 걸음을 재촉하여 마당에서 오랜 시간 지빠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한 놀라운 사실!


지빠귀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구애할 때는 목소리를 완전히 바꾸는 듯 보였다.

찾아보니 지빠귀는 다른 새의 소리뿐 아니라  풀벌레 같은 소리도 곧잘 흉내 낸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가짜일 확률이 높다. 뇌과학자들이 속속 우리의 멍청함을 밝히고 있음에도 난 좀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나 역시 멍청했다. 이렇게 멍청한 인간들이 지구 위 최상위 유일한 포식자라니!


지구여! 미안하다.

작가의 이전글 참호 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