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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유 Sep 27. 2022

참호 일기

참호가 무너지고 있다.

2022. 09. 19


멧돼지와 하이에나가 마주 보며 대치중이다.

둘 모두 등을 보이면 죽는다.

멧돼지는 사냥감이 되어 죽고, 하이에나는 굶어 죽는다.

하이에나는 쉽사리 멧돼지 정면으로 돌진하지 못한다.

멧돼지는  바위를 등지고 여차하면 동귀어진할 태세다.


하이에나는 멧돼지의 살기에 기가 죽었다.

그러나 그는 질긴 사냥꾼이다.


대치의 그림자가 점점 짧아지더니 이제 거의 몽당연필이 되었다.

그때 한 무리의 암사자가 해 그림자처럼 다가와 멧돼지 등 뒤를 덮쳤다.

멧돼지는 그 자리에서 죽고, 하이에나는 입맛을 다시다가 며칠 뒤 굶어 죽었다.

허무하게 끝난 대치였다.


하이에나와 멧돼지는 최선을 다 해 살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나 결국 둘 다 죽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들의 최선은 옳은가?

왜 멧돼지는 멧돼지로 태어났으며 하이에나는 하이에나로 태어났을까?

멧돼지로 태어나 사자로 살 방법은 없는가?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을 찾고 싶다.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난 내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이에나나, 멧돼지로 태어난 게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혼자였음이 문제라는 사실 말이다.

혼자 떨어져 있는 들소만 사자의 먹잇감이 되는 법이다.


하이에나는 무리에서 쫓겨난 외톨이였고, 멧돼지도 가족 모두 사냥당한 뒤 홀로 생존한 외톨이였다.

오래 살아남은 멧돼지 무리를 살펴보니 그 멧돼지 가족은 맹수의 출현을 미리 알려주는 새 무리와 함께 공존했다고 한다.     


공존.... 인류는 공존을 버리려고 작심한 것처럼 보인다.

전쟁을 일으키고, 반목과 갈등을 조장하고, 식량과 에너지 고갈을 부추겨 또 다른 전쟁을 준비 중인 지구인.


여기 한라산도 무너지고 있다.

포클레인 굉음의 끝없는 포격이 이어지고 있다. 한라산은 쇄도하는 고층건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나의 제주가 기울어지고 있다.


참호에 비석을 세울 때가 된 걸까?

이제 다른 무덤을 찾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난, 새로운 공존 파트너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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