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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 일기
2015년 6월 12일
by
페이지 유
Sep 29. 2022
2015년 6월 12일
빠듯하고 하얀 종이라니....
널 만지고 바라보고 있으면 황홀해진다.
나는 너를 향해 시를 쓰기로 하였다.
유치 찬란한 시도라 해도 그것이 모종의 생산력을 담보하는 일이라 여긴다.
강아지가 코를 고는 소리로 꽉 찬 새벽, 잠에서 깨어 책상에 앉았다.
나는 어제 문방구에서 한참 고민하다 고른 노트를 펼친다. 꽤 비싼 노트다.
이 노트는 글을 쓰는 용도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 태어났다.
그런데 나에게 왔네? 재밌는 일을 만드는 건 언제나 실차다.
그 어떤 인쇄의 흔적도 허용하지 않은,
매화 꽃빛 종이를 사랑한다.
어쩌면
네가 보고 싶어 강아지 코 고는 소리를 핑계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이런 존재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시를 쓰게 된다.
나는 어쩌다 눈코입도 없는 너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나는 어쩌다 목소리도 없는 너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지금 내 마음은 이렇다.
키스 자렛의 피아노가 달빛에 부서지는 한 밤에 로시란테란 이름을 그저 닳도록 부르고 싶던 돈키호테가 되어, 너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을 담아 더없이 덧없는 욕망을 놓으며 (적어도 그렇게 믿으며) 시를 써보자.
어느 추운 강 위에는 꽃들이 피기도 전에 얼어붙어 눈처럼 날리는 법이다.
그런 게 가능하냐고 누군가 물어도 (누구나 그렇게 묻겠지) 나는 그것을 증명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키스 자렛이 되고 싶다.
그처럼 피아노를 치고 싶다.
로시란테를 그리워하며 작곡을 하고 싶다.
하루 정도 반해버린 아가씨 입술에서
허락 없이 뺏어 피운 담배 연기로 장막을 드리우고
그 안에서 키스를 하고 싶다.
난.... 그런 걸 못한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건반과 한올지게 놓이는 모습을 보면 잔잔한 파도소리가 들린다. 내가 피아니스트라면 이 바다에 피아노 한 대 놓고 살 텐데....
아.... 그러고 보니 내일 피아니스트가 우리 집에 온다.
모른다고 할 수도 없고, 안다고 할 수도 없는 피아니스트다.
나는 지금껏 피아니스트를 만난 적이 없다.
피아니스트인 척하는 피아니스트는 여럿 만났다.
시 몇 개 읊조리거나,
시집 한 두어 권 썼다고 스스로
시인이라 까부르는 족속도 많이 만났다.
내일 만나는 피아니스트는 그런 족속이 아니길 빈다.
가만있어봐...
나는 어떤 족속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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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유
꿈, 죽음, 사랑의 삶을 살았다. 시한부 경고를 받고 내 무덤을 고민하다, 한라산에 참호를 팠다. 그런데 죽지 않고 12년째 사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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