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이지 유 Sep 02. 2022

참호 일기

시지프스

저 태양이 구르면 다시, 한라산 위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참호에서 나는 용기를 떠올렸다.




참호 일기... 시지프스 


2010년 12월 29일.


시지프스는 저 태양 바로 아래, 

한라산에 참호를 파고 홀로 생일을 맞는다. 


지금 그의 수중엔 수첩과 펜, 부치지 못한 편지 한 통.

그리고 발 밑에 꽁초가 있다.

꽁초를 본 그는 불현듯 용기란 단어에 대해 생각한다. 


(꽁초는 용기의 자태다.)


그의 모든 것을 버릴 용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자기를 버린 자들을 사랑할 용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사막에 우물을 파고 

그 옆에 고무나무를 심을 용기. 


그는 그 고무나무 주변으로 집을 짓는 상상도 한다. 

그러자 이내 상처를 잊었다. 


참으로 가상한 용기다. 

(말할 수 있는 ‘삶’에는 가상함이 있어야 한다. 찾아보니 제주에는 고무나무가 자생하지 않았다. 대신 종가시나무가 있었다. 종가시 나무는 가상함을 갖춘 나무였다.) 


이내 나는 내 방에 종가시 나무를 심는 상상을 한다.  

굵고 잘 생긴 나무는 뿌리가 점점 자라, 

내 방의 벽을 타고 쭉쭉 자라서, 

자라고 더 자라서 지구의 흙더미 속으로 슬며시 손을 집어넣는다. 


나는 참 예쁜 젖가슴을 훔쳐본 것처럼 부끄러워서 그만 

빗자루질을 한다. 


종가시 나무는 사철 내내 나뭇잎을 내린다. 

저 나무의 뿌리가 그만 자라도 좋을 거란 상상은 되지 않는다.

나는 한번도 내 인생에 종가시 같은 나무를 심어본 적이 없다. 


내일 아침, 나는 

종가시나무 아래 서 있을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