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호 일기

시지프스

by 페이지 유
저 태양이 구르면 다시, 한라산 위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참호에서 나는 용기를 떠올렸다.




참호 일기... 시지프스


2010년 12월 29일.


떠오르는 저 태양 바로 아래,

한라산에 참호를 판다. 곧 죽을 날을 대비하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문득 떠올렸다. 내 몸 뉠 자리는 내 손으로 직접 파고 싶다고.


지금 내 옆엔 부치지 못한 편지 한 통과 꽁초가 있다. 꽁초를 보고는 불현듯 용기란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본다.


(꽁초는 용기의 자태다.)


모든 것을 버릴 용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자기를 버린 자들을 사랑할 용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사막에 우물을 파고

그 옆에 고무나무를 심을 용기를 꽁초는 품는다.


참으로 가상한 용기다.

(말할 수 있는 ‘삶’에는 가상함이 있어야 한다. 찾아보니 제주에는 고무나무가 자생하지 않았다. 대신 종가시 나무가 있었다. 종가시 나무는 가상함을 갖춘 나무였다.)


이내 나는 내 방에 종가시 나무를 심는 상상을 한다.

굵고 잘 생긴 나무는 뿌리가 점점 자라,

내 방의 벽을 타고 쭉쭉 자라서,

자라고 더 자라서 지구의 흙더미 속으로 슬며시 손을 집어넣는다.


나는 참 예쁜 젖가슴을 훔쳐본 것처럼 부끄러워서 그만 빗자루질을 한다.


종가시 나무는 사철 내내 나뭇잎을 내린다.

저 나무의 뿌리가 그만 자라도 좋을 거란 상상은 되지 않는다.

나는 한 번도 내 인생에 종가시 같은 나무를 심어본 적이 없다.


내일 아침, 나는

종가시 나무 아래 서 있을 것.


keyword